
영화 ‘화이’의 한장면.
그 전해인 2002년엔 ‘취화선’(임권택)과 ‘오아시스’(이창동)가 각각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4년엔 김기덕의 ‘사마리아’와 ‘빈 집’이 베를린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2003년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라는 독특한 공상과학영화로 데뷔해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당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던 한국 영화계에서 유독 지지부진했던 장르가 공상과학영화다. 이런 가운데 ‘지구를 지켜라’는 의미 있는 실험으로 평가됐다.
10년 만의 장준환 영화
이 영화에서 나중에 외계인으로 밝혀지는 강 사장 역의 백윤식은 영화배우로서 재발견됐다. 중년의 남성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연기의 폭을 눈에 띄게 넓혔다고 할 수 있다. 평론가들은 ‘지구를 지켜라’에 대해 “상당한 미덕을 담고 있는 저주받은 걸작”으로 평가했다. 장준환은 독특한 감성과 상상력을 이 영화에 녹여냈다. 이로 인해 상당수 영화 마니아는 그의 차기작을 기다렸다.
그러나 장준환은 무려 10년 동안 침묵을 지킨 끝에 올해 가을 두 번째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스크린에 걸었다.
‘화이’에서 1998년 5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낮도깨비’라는 범죄집단은 한 아이를 유괴한다. ‘낮도깨비’는 두목 격인 냉혹하고 잔인한 석태(김윤석), 석태의 동생으로서 좀 모자라지만 자동차 운전을 잘하는 기태(조진웅), 전체적인 범행 계획을 짜는 이지적인 진성(장현성), 총기와 기계를 잘 다루는 범수(박해준), 범죄를 마치 장난처럼 여기는 동범(김성균)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서울 근교에서 석태의 아내 영주(임지은)와 함께 화훼농장을 경영하면서 부패한 형사(박용우)가 알선한 범죄를 실행에 옮긴 뒤 수고비를 받기도 한다. 유괴한 아이에게 ‘화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같이 살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낮도깨비’가 화이를 유괴한 이유를 관객들에게 바로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10여 년이 흐른 뒤 진성은 화이를 싱가포르에 있는 예술학교로 유학 보내려 한다. 그런데 형사는 이들에게 건설업자 전승기(문성근)가 청탁한 일을 맡긴다. 전승기는 재개발 예정지에 사는 부부가 집을 비워주지 않자 이 부부를 제거하기를 원한다. 진성은 일을 맡지 않으려 하지만 석태는 그 집주인이 자신과 구원(舊怨) 관계인 임형택(이경영)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을 맡는다.
화이(여진구)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다섯 남자를 모두 아버지라고 부르며 이들의 특기를 전수받는다. 화이는 어려서부터 내내 괴물이 자기를 덮치는 환영에 시달린다. 석태는 화이가 괴물이 보인다고 할 때마다 지하실에 가둬놓고 괴물에 맞서라고 한다. ‘낮도깨비’는 임형택 부부를 죽이기 위해 화이를 이용한다.
어머니에 대한 집착
화이는 학교에서 귀가하는 학생인 것처럼 위장해 집 안으로 들어가서는 ‘낮도깨비’가 들어오기 쉽게 잠금장치를 풀어놓는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화이는 이 집이 어린 시절 자기가 살던 집이라는 단서를 얻고 임형택 부부가 자신의 진짜 부모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화이는 사건의 진행을 막지 못한다.
아내를 구하러 집에 돌아온 임형택은 석태의 사주를 받은 화이가 쏜 총에 맞아 숨진다. 임형택의 아내는 어수선한 틈을 타 집에서 도망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이때부터 진실을 알려고 하는 동시에 임형택의 아내를 보호하려는 화이와 ‘낮도깨비’ 아버지들 간의 사이는 멀어진다. 게다가 ‘낮도깨비’는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승기 측과도 마찰을 빚는다.
주인공 화이가 ‘괴물’ 환영에 시달리는 설정은 장준환의 전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신하균)가 강 사장을 ‘외계인’으로 생각하는 점과 유사하다. 또 장준환의 단편 ‘2001 이매진’에서 주인공이 자신을 ‘부활한 존 레넌’으로 믿는 점과도 맥을 같이한다. 어린 주인공이 낯선 곳에 처해져 두려움에 떠는 장면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악마의 등뼈’(2001)나 ‘판의 미로’(2006)에서 스페인 내전 시기 아동들이 부모를 잃고 보육원 등으로 보내지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