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21일 대통령직인수위에서 각 분과 간사들이 국정 비전-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지난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건설업계에 만연한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공공공사 분리발주 법제화 추진’을 주요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5월 28일 정부가 발표한 ‘박근혜 정부 140개 국정과제’에도 대규모 계약의 분할 분리발주 법제화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6월 14일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건설산업 불공정 거래관행 개선방안’에서는 분리발주 법제화 내용이 제외됐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때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국정과제로 채택한 내용이 정작 주무부처 발표에서는 빠진 것이다.
전문건설업계는 건설업계에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 관행이 만연한 주된 이유로 통합발주에 따른 수직계열화 생산방식을 꼽는다. 분리발주 법제화 등을 통해 수평적 생산체계로 바꿔야만 고질적인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업계의 줄기찬 요구를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가 외면한 이유는 뭘까.
제동 걸린 분리발주
건설공사를 수행하는 방식은 크게 통합발주와 분리발주로 구분할 수 있다. 통합발주는 발주자가 사업내용이 확정된 전체 공사를 하나의 원도급 업체에 일괄 발주하는 방식이다. 통합발주를 하면 전체 공사를 종합적으로 계획하고 관리하며 조정할 원도급사를 예외없이 종합건설사가 맡는다. 공종별 시공을 담당하는 전문건설사들은 하도급사로 공사에 참여하게 된다. 발주자는 원도급사와 계약을 맺고, 원도급사는 시공을 담당할 하도급사와 공종별로 각각 계약을 맺어 공사를 진행한다.
공사 계약 단계에서부터 발주처-원도급사-하도급사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통합발주를 수직적, 계층적 생산체계라고 한다. 전문건설업계가 ‘통합발주’를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이 생기는 근본 원인으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주처와 원도급사는 1대 1로 동등한 계약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원도급사와 하도급사는 1대 다수의 계약관계로 변모해 원도급사가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반면 분리발주를 하면 발주자는 토공사와 철근 콘크리트, 마감, 설비공사 등 건설공사를 구성하는 개별 공종을 각각의 시공 능력을 보유한 전문업체에 나누어 계약하게 된다. 분리발주를 하면 통합발주 때 하도급사 지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전문건설사들도 발주자와 1대 1 계약을 맺는 원도급사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지난 대선 때부터 분리발주 법제화를 학수고대한 전문건설업계는 분리발주 법제화 움직임에 제동이 걸리자 크게 반발했다. 지난 9월에는 대한전문건설협회 주도로 ‘전국 5만 건설하도급업체 및 150만 건설하도급 가족 일동’ 명의로 분리발주 법제화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등 각계에 냈다. 탄원서에서 전문건설인들은 “(건설업계에 만연한) 불법행위를 근절하자는 것인데도, 종합건설 측은 자신들의 이윤침해 방지를 위해 엉뚱한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정부는 그것이 설득력이 없음에도 법률 개정을 주저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강조했다.
하도급사에 불이익 전가
정부와 새누리당이 분리발주 법제화에 제동을 건 이유는 ‘분리발주를 할 경우 건설공사가 잘못됐을 때 책임이 불분명해진다’거나 ‘분리발주로 발주기관의 업무량이 증가한다’는 등의 부작용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건설업계는 “분리발주를 하면 오히려 책임시공이 이뤄져 품질 확보는 물론 예산 절감도 가능하다”고 반박한다. 분리발주가 고질적인 불공정 하도급 행위를 근절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한 전문건설 관계자는 “분리발주를 법제화하면 중소·지방건설업을 육성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해서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리발주 법제화에 대한 전문건설업계 요구가 거세지자 새누리당 정책위원회는 ‘발주제도 선진화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 7월 9일 국회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는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 등 유관 부처 관계자와 대한건설협회, 대한전문건설협회, 건설산업연구원, 대한건설정책연구원, 건설기술연구원, 조달연구원, LH공사 등 건설산업 주요 기관 관계자들이 참여해 의견을 개진했다. 하지만 분리발주 시행에 대한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각계 의견을 청취하는 수준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