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루시초프는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6개월 뒤인 1953년 3월 소련 공산당 제1서기에 취임했다. 1958년부터 총리와 국가평의회 의장을 겸임했으나 △독특한 성정(性情) △현실을 무시한 정책 추진 △무모한 측근 제거 등으로 인해 기득권층 반발에 직면하면서 1964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 의해 실각당했다. 실각 후 7년간 가택연금됐다가 사망했다.
경험, 자질 부족
일부 전문가는 △아마추어적 통치 행태 △비현실적 인식에 따른 정책 난맥 △전횡적 인사 등으로 권력층 내에서 체제 장래에 대한 불안감,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심화하는 등 북한에서 균열 요인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질과 경험이 부족한 김정은이 흐루시초프의 전철을 밟을 소지가 있다는 것.
흐루시초프는 집권하는 동안 지도자로서의 인성,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학력 콤플렉스도 갖고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받은 정규교육은 초등학교 2년 과정이 전부다. 20대 후반 도네츠크공업전문대학에 개설된 노동자학부 속성 과정을 수료했다.
김정은은 10대 때 스위스에서 공부했다. 학창 시절부터 술, 담배를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스위스 일간지 ‘르마탱’에 따르면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국제학교 재학 첫해 75일, 두 번째 해 105일을 결석했다. 오후에만 학교에 나올 때도 많았다. 성적도 나빴다. 수학, 문화, 사회, 독일어 등에서 간신히 과락을 면했다. 음악에서는 5등급(최고등급 6등급)을 받았다.
김정은은 중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2001~2007년 김정은만을 위해 급조한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군사 분야에 방점을 찍은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고 한국 정보당국은 파악한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은 군 엘리트를 양성하는 곳이다.
흐루시초프는 통치 기간 자기과시적, 독선적, 공격적 언행을 일삼았다. 다변(多辯)이면서 대중연설을 즐겼다. 스탈린 사망 3년 후인 1956년 2월 제20차 소련 공산당 당대회에서 4시간에 걸쳐 스탈린의 비인도적 행태와 잔인함을 비판했다. 1960년 9월 유엔 총회 연설 분량은 300여 쪽에 달했다.

흐루시초프는 전용기가 아닌 군함을 타고 미국, 영국을 방문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배우자를 정상회담에 대동하지 않는 게 일종의 관례였는데, 흐루시초프는 정상회담 때 아내를 대동했다.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흐루시초프는 과시적이면서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논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