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고려대 교수(철학)
■ 패널 | 안상훈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 강명순 세계빈곤퇴치회 이사장·전 국회의원
■ 정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복지국가의 이상과 현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복지’를 최우선 순위의 공약으로 내세우며 이구동성으로 복지정책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바야흐로 한국에도 ‘복지국가’의 시대가 열리려는 모양이다.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달려온 우리에게 복지란 참 낯선 단어였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돌보는 일은 가족과 친지의 몫이었고, 타인을 돕는 것은 그저 가진 자의 미덕에 맡겨진 일이었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대가족이 해체됐을 뿐 아니라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한국 사회가 이미 가족 단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세계 체제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후에도 우리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표방한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에 빠른 속도로 편입되면서 사회 구성원들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빈부격차도 심화했다. 경쟁에 뒤처진 사회적 약자를 돌볼 여유가 점점 더 없어지면서 ‘복지국가’란 요원한 일인 듯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사실이다. 선거에서 승리를 바라는 정치인들은 불안정한 무한경쟁 사회의 유권자들이 국가적 차원의 복지를 열망하고 있음을 읽어냈고, 그것을 정치의 이슈로 삼았다. 2007년 대통령선거의 화두가 ‘경제’였다면 2012년 대선의 프레임은 ‘복지’였다. 진보 진영에서 논의하던 복지 이슈를 보수 진영에서 가져가면서 복지를 둘러싼 정책 경쟁에 불이 붙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국가가 그 성과를 효율적으로 나눠 가지며 장기적으로 안정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할 때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하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국민의 생활수준을 일정 정도 보장하고자 개개인의 삶에 국가가 다방면으로 개입한다는 점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그럼에도 복지국가를 사회민주주의와 구분해 논의하는 것은 그것이 이념을 넘어 모든 국가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논의되고 시행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를 대표한다는 현 집권당이 복지 이슈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복지국가 논의의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복지국가 논의는 이념을 넘어선 것인 동시에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성취한 국가에서 안정적 발전을 위해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다. 그것은 ‘혁명’과 같은 극단적 방법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며 대다수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 집행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은 정치·경제 면에서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만큼 복지국가를 구현하려면 서로 다른 의견 간에 다소 지루할 정도의 섬세한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와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제도적 개입 수준을 놓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압축 성장이 적잖은 폐해를 낳았듯 최근 몇 년 사이 복지를 둘러싼 정치권의 과도한 경쟁은 복지국가 관련 논의를 상당 부분 왜곡하고 있다.
최근 선거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내놓았던 무지갯빛 복지 공약이 정책 집행 과정에서 혼란에 빠지는 것은, 복지국가가 국민의 합의 도출 과정이 생략된 채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더욱이 우리 앞에는 분단 극복이라는 난제가 놓여 있다. 복지국가 논의가 한국 사회의 발전 방향만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 거주민의 삶의 변화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복지국가 논의는 기본적으로 탈이념적인 동시에 이념적 입장차를 고려하고 그것들을 넘어서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통일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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