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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전차’를 경제대국으로 ‘무티(엄마) 리더십’의 3選 질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녹슨 전차’를 경제대국으로 ‘무티(엄마) 리더십’의 3選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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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과반 획득에는 실패해 사민당과 대연정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 과정에서 누가 총리가 될지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선거에서 진 슈뢰더가 총리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우세해졌다. 결국 메르켈은 2005년 11월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이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인디라 간디 전 인도 총리,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 등 제3세계나 군소 국가에서 대통령이나 총리 출신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여성들이 대통령이나 총리로 선출된 적은 있지만, 독일 같은 강대국에서 여성이 자력으로 국가 지도자에 오른 사례는 드물었다. 더구나 궁핍한 집안에서 자란 동독 출신의 개신교 여성이 서독 출신의 부유한 가톨릭계 남성이 대부분이던 보수 정당의 대표에 이어 총리에까지 오른 것은 독일의 기존 정치 관행을 일거에 무너뜨린 대변혁이었다.

‘아니오 부인’의 소신

메르켈은 지구촌 여성 지도자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의 총리 취임 후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2006~2010),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2007~ ),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2010~2013),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2011~ ), 박근혜 한국 대통령(2013~ ) 등 세계 각국에서 속속 여성 지도자가 탄생했다. 그의 당선은 독일어 사전에 없던 신조어 ‘칸츨러린(kanzlerin·총리를 뜻하는 kanzler의 여성 형태)’도 탄생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총리가 됐지만 그의 앞길은 험난했다. 무엇보다 경제 상황이 너무 나빴다. 당시 독일은 12%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상 최대인 520만 명이 직장을 잃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핵심 산업이던 자동차, 중공업 등도 일본 등 아시아 국가의 추격으로 경쟁력이 떨어졌고, 경제성장률은 사실상 제로 상태였다.



정치인 메르켈의 진정한 능력은 총리 집권 후 본격적으로 빛을 발했다. 우선 그는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슈뢰더 총리의 개혁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2003년 슈뢰더 총리는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과도한 복지제도 축소 등을 골자로 한 독일 경제의 개혁 청사진인 ‘어젠다 2010’을 발표했다. 고용·연금·의료·세제·교육 등 사회 전 분야를 망라하는 이 개혁 법안은 슈뢰더의 재집권 실패로 사장될 위기에 처했으나 메르켈은 ‘낡은 독일’을 살리려면 이 법안이 꼭 필요하다고 밀어붙였다.

실험실에서 청춘을 보낸 학자 출신답게 메르켈은 정책 입안과 수행에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는 깜짝쇼나 화려한 정치 이벤트를 벌인 적이 없다. 좀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근면성실’로 대표되는 독일의 국민성과 부합하는 면모다.

집권 초기에도 그랬지만, 메르켈은 야당의 정책도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수용하는 유연성과 과감성도 갖췄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는 사민당과 녹색당 등 좌파 정당의 핵심 공약이던 원자력발전소 폐기 등을 먼저 들고 나와 유권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이 밖에도 징병제 폐지, 가정복지 강화, 양성 평등정책 등 야당의 주장을 수용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는 그가 3선에 성공한 주요인이다.

독일 내에서 메르켈은 독일어로 엄마를 뜻하는 ‘무티(Mutti)’로 불린다.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척척 해결해주는 엄마처럼 국민이 믿고 의지할 만한 지도자라는 극찬이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정치 초년병 시절 수수하고 촌스러운 의상과 화장법, 머리 모양 탓에 단골 ‘워스트 드레서’로 꼽혔던 소박한 패션 감각도 ‘엄마’ 이미지를 강화하는 요소다.

하지만 남유럽 구제금융 국가 국민은 메르켈을 ‘프라우 나인(Frau Nein, 즉 ‘Mrs. No’[아니오 부인])’이라고 부른다. 유럽 재정위기가 심화하자 그리스, 스페인 등은 “독일의 긴축 요구가 경제위기를 더 악화시킨다”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메르켈은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며 ‘아니오’를 고수했다. 2008년 강성으로 유명한 독일 기관사 노조를 상대로 “머리로 벽을 들이받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봤자 언제나 벽이 이긴다”고 일갈했던 그의 단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메르켈의 3선 성공은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사안이다. 메르켈이 그리스, 포르투갈 등 재정난에 허덕이는 유로존 국가를 상대로 강력한 구조개혁 및 긴축 정책을 주문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그간 총선 승리를 위해 독일의 추가 재정 부담이 필요한 유로존 위기 탈출 정책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이제 선거에서 승리한 만큼 비틀대는 유럽 경제의 구원투수 역할에 매진할 가능성이 크다. 메르켈이 유로존 재정위기 극복을 주도한다면 미국 대통령 못지않게 강력한 발언권을 지닌, 국적을 초월한 지도자로 세계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녹슨 전차’를 경제대국으로 ‘무티(엄마) 리더십’의 3選 질주


신동아 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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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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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전차’를 경제대국으로 ‘무티(엄마) 리더십’의 3選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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