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하기아 소피아 뛰어넘는 불멸의 유산을 쌓다

‘오스만의 미켈란젤로’ 미마르 시난

  • 서정일|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jeongseo@snu.ac.kr

    입력2013-10-18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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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마르 시난(1490~1588)은 같은 시기 서유럽에서 활약한 미켈란젤로에 비견된다. 견실함과 아름다움이 균형을 이룬 건축을 추구했던 그는 신의 도움, 인간의 노력과 인내를 통해 완벽하고 우아한 그의 창작물이 불멸할 것을 소망했다. 그것은 유럽 르네상스 건축의 가치 체계와도 통했다.
    하기아 소피아 뛰어넘는 불멸의 유산을 쌓다

    <사진 1> 멜키오르 로리크가 그린 이스탄불 전경(1559, 1561~62). 제3 언덕 위의 쉴레이마니예가 보인다.

    마르마라 바다와 보스포루스 해협이 만나는 곳. 조용히 출렁이는 물결 위로 이스탄불 반도가 떠 있고, 두두룩하게 솟은 언덕 위엔 토카프 궁전, 하기아 소피아, 블루 모스크가 나란히 앉아 있다. 바다와 땅, 하늘과 더불어 긴 세월 동안 다듬어진 편안한 풍경이다. 고유한 문명의 존재를 증언하는 이국적 경관이다.

    갈라타 지역으로 올라가면 골든혼 너머로 이스탄불 반도의 풍경을 더 가까이 볼 수 있다. 이스탄불 반도의 일곱 언덕 가운데 세 번째 언덕이 눈앞에 등장한다. 크고 작은 둥근 지붕을 이고 있는 그 언덕의 건물들은, 마치 바다에서 물방울들이 솟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지막한 건물들을 아래로 거느리면서 하나의 집합적인 경치를 이룬다.

    곳곳의 돔과 첨탑들이 이루는 이 도시의 실루엣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루엣 가운데 하나였을 이것을 만든 주체는 바로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반도를 무대로 한 마지막 세계 제국인 오스만이었다. 지금의 풍광은 제국시대에서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이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16세기 유럽 화가 멜키오르 로리크가 그린 이스탄불과 비교해보라(사진 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보존되고 있는 이스탄불 역사지구 풍경은 앞으로도 긴 시간 인류와 함께하며 불멸로 남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상징



    하기아 소피아 뛰어넘는 불멸의 유산을 쌓다

    <사진 2> 쉴레이마니예 자미 내부의 돔.

    비잔틴 제국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건축물 하기아 소피아(532~537년)에 대해서는 이 연재에서 이미 살펴보았다(2013년 4월호 참조). 그렇다면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제국의 참모습을 웅변하는 건축물은 무엇일까. 갈라타에서 바라다보이는 세 번째 언덕에서 웅장하고도 단정한 외관으로 서 있는 이슬람 모스크가 그것이다. 이 건축물에 오스만 제국의 성과가 집약돼 있다.

    이 모스크의 이름은 ‘쉴레이마니예’. 건립자인 오스만 제국의 열 번째 술탄인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1520~1566년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통치한 그를 서양인들은 ‘위대한 자(il Magnifico)’ 즉 ‘대제’라고 불렀다. 쉴레이만 대제는 이라크와 발칸 반도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둔 뒤 그의 재산을 쏟아부어 1577년 쉴레이마니예 자미(‘자미’는 금요 모스크를 가리키는 터키어)를 완공했다.

    이뿐만 아니라 주변에 여러 채의 건축물도 함께 지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넓은 평지 위에 지어진 건물군(群)은 북쪽으로 골든혼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곳은 대도시 이스탄불에서 술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행차하는 종교적 중심이었다. 이스탄불 주민들의 문화 중심이자 일상생활의 중심이기도 했다.

    쉴레이마니예 자미는 주변에 마당과 담장을 거느리고 기품 있게 서 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자미의 영역은 216×144m 규모다. 자미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웅장하고도 조용한 빛이 가득하다. 탄성을 자아내는 커다란 공간이 사람을 맞는다. 장엄한 공간의 바닥에선 무슬림들이 성지인 남동쪽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신도들은 모스크 안에서 메카 쪽을 향할 때 ‘키블라’라는 벽과 마주한다. 그 벽 한가운데 ‘미흐라브’라는 벽감(壁龕·장식을 목적으로 벽을 오목하게 판 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키블라와 미흐라브를 두는 것은 이슬람의 오래되고 확고한 전통이다. 그런데 이 모스크의 나머지 부분은 다른 모스크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과 놀라운 축조 방식을 지녔다.

    신의 섭리 표현한 건물

    하기아 소피아 뛰어넘는 불멸의 유산을 쌓다

    <사진 3> 쉴레이마니예 자미의 내부.

    자미의 중앙에서 사방을 보면 4개의 육중한 벽기둥이 큰 정사각형 바닥의 각 모서리에서 아치를 떠받치고 있다. 아치, 펜던티브, 반구, 그리고 최상부 돔까지 여러 구조체가 질서정연하게 기하학적 체계를 이루며 결합해 있다. 전체적으로는 넓고 천장이 높아 탁 트인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자미 한가운데서 꼭대기를 올려다보면 둥근 돔이 보인다. 서양 건축 전통에서 돔은 종종 하늘을 암시하는데, 이곳의 돔도 천상을 은유한 듯하다(사진 2). 돔 표면에는 아름다운 패턴을 천상의 그림인 양 그려놓아, 돔의 장려한 자태를 더해준다.

    돔의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는 둥근 금빛 명판에 장식적인 글자가 쓰여 있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하산 첼레비가 쓴 쿠란 구절(35장 41절)이다.

    “하늘과 땅이 운행을 멈추지 않도록 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것들이 운행을 벗어날 때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유지시킬 수 없나니 실로 하나님은 관대하심과 관용으로 충만하심이라.”

    돔이 하늘을 은유함을 명확하게 해주는 문장이다. 건물 전체가 신의 섭리 아래 놓여 있음을 말해준다.

    남쪽과 북쪽의 아치 아랫부분은 4개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다(사진 3). 각 기둥은 하나의 큰 돌을 깎아 만든 것이라 그 자체의 위용도 대단하다. 쉴레이마니예를 지을 때 창립자인 술탄을 비롯해 설계자와 건설자들은 이 건축물의 상징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뚜렷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건물을 지은 궁정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친구 무스타파 사이 첼레비에게 부탁해 남긴 생각을 읽어보자. ‘건설기록(Tezkiretu ‘l’Bunyn)’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산문과 운문이 결합된 형식이다.

    4개의 대리석 기둥은 4명의 선택된 친구들을 상징하며 그 각각은 믿음의 정원에 있는 당당한 사이프러스 같다. 각각은 다른 땅에서 왔는데, 그중 하나는 이교도 시대에 한 처녀에 의해 크즈타쉬 지구에 세워진 것이다. 처녀 기둥(크즈타쉬)이라 불리는 그 기둥은 큰 돌 하나로 만든 미나레트 같고 투바 나무 둥지 같다.

    순수한 대리석 기둥들은/

    천국의 바퀴살이 된 것 같도다/

    한 처녀가 보물을 사람들과 신령들에게 선사했고/

    그녀를 기억하도록 기념비를 세웠도다/

    산을 깎는 자 같은 거장이 왔고/

    그가 그것과 더불어 이 기둥 없는 볼트의 벽기둥을 만들었도다//

    ‘4명의 선택된 친구들’은 이슬람교 수니파에서 숭상하는 4명의 정통 칼리파, 즉 라쉬둔 칼리파를 가리킨다(그들의 터키식 이름은 에부 베키르, 외메르, 오스만, 알리). 이 칼리파를 상징하는 4개의 기둥은 천상을 떠받치는 바퀴살이나 정원의 사이프러스 나무들로도 읽혔다. 이렇듯 종교적 상징인 동시에 오스만 제국 위업의 상징이기도 했다.

    인용한 글에서 보듯 이 기둥 중 하나는 이스탄불 내에서 가져왔고, 다른 하나는 토카프 궁전의 첫째 마당에 보관되어 있던 건설자재를 가져온 것이다. 나머지 두 기둥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레바논 지역의 바알베크에서 배로 실어 왔다.

    두 곳은 술탄 쉴레이만의 아버지인 술탄 셀림 1세 때 새로 확보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바알베크는 로마시대 가장 큰 신전이 있던 곳이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6세기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짓기 위해 그 신전의 기둥 8개를 해체해 배로 실어 오기도 했다.

    그러한 고대 제국의 전통에 따라 쉴레이만도 제국 곳곳에서 대표적인 고대 유산의 기둥을 가져와 한 건물에 결합시켰다. 제국의 통합을 과시한 것이다. 기둥만이 아니다. 아치의 홍예석들은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을 깎은 것인데 그것들도 제국 여러 곳에서 가져왔다.

    이 건축 공간의 종교적 경건함과 제국의 힘은 규모와 재료에서만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건축물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이 건물은 보면 볼수록 고도로 세련된 비례의 감각으로 만들어져 있다.

    미흐라브와 밈바르(연단), 문과 창문, 각종 장식물 등은 중요한 것이 더 강조돼 보이도록 비례를 맞추면서도 크기와 색채에 차이가 나게 했다. 볼트(vault·아치형 천장), 돔 같은 곡선 구조체를 입체적으로 짜 맞춰 공간 전체의 수학적 비례관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아치들은 “하늘의 궁륭(穹·활이나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상) 같고 미인의 눈썹 같아, 전문가들의 눈을 매료시켰다”고 전한다. 종교적 성소에 걸맞은 아름다움이 넘치는 공간이 되도록 건축가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비잔틴의 유산을 능가하다

    흥미롭게도 이 자미 안에서는 하기아 소피아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건축물의 평면과 구조체 모양은 하기아 소피아를 많이 닮았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전부터 오스만인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침해할 수 없는 신비한 걸작으로 간주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파티흐(정복자)’로 불리게 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가장 먼저 그곳을 찾아가 경의를 표하고 곧바로 미흐라브를 설치해 이슬람의 성소로 삼았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능가하거나 모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쉴레이만 대제의 궁정건축가 미마르 시난도 하기아 소피아의 양식을 따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쉴레이마니예는 하기아 소피아 양식을 따라 만든 건물로서는 완벽했다.

    “시대의 기술자들과 상서로운 기념비적 건물들의 감독자들이 볼 때 하기아 소피아의 양식으로 지은 이전의 건물들은 품위를 갖추지 못했지만, 이 종은 고귀한 세흐자데 술탄 메흐메트 자미와 그것을 본으로 삼아 만든 고귀한 술탄 쉴레이만 건물군을 완벽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높은 건축물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이 만들어졌고 그 각각은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하기아 소피아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닐까. 당대의 무슬림들은 쉴레이마니예의 손을 들어주려 했을 것이다. 그 시대의 건축가, 건설가 그리고 술탄은 그렇게 자부했을 것이다. 쉴레이마니예의 구조와 빛 처리는 1000년 전의 걸작인 하기아 소피아를 능가할 정도로 논리적이고 명료하며 빈틈이 없다.

    이 건물의 구조적 형태들은 안팎에서 감춤 없이 드러난다. 이는 모든 것을 밝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오스만 제국의 문화적 자신감으로 여겨진다. 내부로 들이비치는 빛은 창들의 위치를 다 드러내며 건물 안을 환하고 부드럽게 비춘다. 논리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압도적인 장엄함과 종교적 경건함이 함께 깃들어 있다. 하기아 소피아가 웅장하고 신비한 어둠 속에 플라톤주의적 상징을 담고 있다면, 쉴레이마니예에서 뚜렷이 읽히는 것은 그때까지 없던 새롭고 현대적인 미학이다.

    아치, 돔, 기둥, 문의 조합은 뜯어보면 볼수록 정확히 짜 맞춘 인상을 준다. 이는 하기아 소피아의 외관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하기아 소피아는 2000여 년 가까운 세월 속에 건물이 낡아 구조가 위태로워졌다. 그래서 건물 바깥에 덕지덕지 수많은 부벽을 지어 보수한 상태다.

    쉴레이만 대제의 건축가도 보수공사를 맡았다. 하지만 쉴레이마니예는 하기아 소피아의 미적, 구조적 결함마저 극복한 최고 완성도의 디자인을 요구했던 것 같다. 하기아 소피아보다 더 완벽한 구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선지 쉴레이마니예 자미는 깔끔하고 완벽한 인상으로 지금도 새로 지은 건물처럼 서 있다.

    지도층의 기부와 명예

    하기아 소피아 뛰어넘는 불멸의 유산을 쌓다

    <사진 4> 쉴레이마니예 자미의 앞마당. 한가운데에 샤르드반이 보인다.

    오스만인들은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건설하면서도 콘스탄티노플을 능가하려 했다. 1453년, 1000년 역사를 이어온 비잔틴 제국의 최후 보루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린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곧바로 이 기독교 도시를 이슬람 제국의 상징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비잔틴 교회들이 서 있던 언덕에는 자미와 왕궁을 지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있던 물리적 기반-길, 성벽, 수로, 광장, 그 밖의 구조물-들은 선별적으로 활용했다.

    메흐메트 2세의 새 수도 건설은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승리를 떨쳐 보이려는 의도가 넘쳐났다. 그에겐 그리스 문명을 존중하고 껴안을 아량이 있었다. 그의 정복지에 있는 아테네, 코린토스, 델포이 신전을 방문했던 메흐메트 2세는 이슬람 중심으로 제국을 경영하고 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문명의 유산에 대해 보인 태도는 취사선택적이었다.

    다시 쉴레이마니예 자미 안으로 들어가보자. 키블라 벽에 난 창문들을 통해 그 너머에 마당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 쉴레이만의 무덤이 있다. 그의 아내 록셀라나의 무덤은 그곳에 독립된 건물로 서 있다. 이런 배치 때문에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이들은 이 건물의 창건자에게도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런 위계적 배치는 오스만 고전기에 확립됐다.

    오스만 건축사업의 주된 재원은 술탄과 지도층의 기부로 마련됐다. 터키어로 ‘바크프’라고 하는 이 기부는 이슬람의 오랜 전통에서 나왔다. 바크프는 종교나 자선을 목적으로 한 토지나 세수(稅收)의 원천이다. 메드레세, 이마레트, 모스크 같은 종교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쉴레이만뿐만 아니라 뤼스탐 파샤, 소쿨루 메흐메트 파샤 같은 그의 재상들도 종교재단을 설립하고 건축사업을 펼쳤다.

    여러 백성이 사용하는 공공건축물도 바크프로 지어졌다. 그 후원자는 명예라는 대가를 받았다. 이는 같은 시기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와 비교해볼 만하다. 유럽에서도 공공사업을 장려했고 후원자의 명예를 독려했다.

    水道체계와 정교하게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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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5> 카이타네 물 공급체계.

    무덤 반대편에는 자미 본체를 사이에 두고 앞마당이 있다(사진 4). 그래서 앞마당과 자미 본체, 묘역이 3개의 직사각형 평면을 이루며 일렬로 이어지는 디자인을 이룬다. 지금은 앞마당을 쓰지 않는 자미가 많은데, 원래는 앞마당이 자미 본체로 들어가는 정식 입구였다.

    여러 개의 기둥이 사방을 감싸고 있는 앞마당 한가운데 장식 분수인 ‘샤르드반’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15~16세기의 물 공급체계는 대도시 이스탄불의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다. 수도시설은 오스만 제국 건축가들의 중요 과업이었다. 건축가들은 도시 외곽부터 수로체계를 건설해 도시 곳곳에 상수도관을 설치했다. 로마시대의 옛 수도교도 보수해서 썼다.

    대도시 이스탄불의 물 공급을 위해 총괄계획을 세웠다. 그에 따라 취수지, 댐, 수로, 터널, 주요 배수지점(터키어로 ‘탁심’), 사이폰(曲管) 등을 계획했다. 이스탄불 외곽 벨그라드 숲의 카이타네 물 공급체계가 대표적인 예다(사진 5). 쉴레이마니예는 ‘할칼르 수유’라는 130여 km에 달하는 16개의 급수체계와 연결돼 있었다.

    하기아 소피아 뛰어넘는 불멸의 유산을 쌓다

    <사진 6> 밖에서 본 쉴레이마니예.

    1554~1563년 재건된 키르크세스메 체계도 쉴레이마니예와 긴밀하게 결합됐다. 4개의 수도교가 포함됐고 수도교는 높이가 최고 35m, 길이 700m에 이르렀다. 이 체계로 이스탄불 내 300개가 넘는 곳의 분수에 물이 공급됐다.

    오스만 제국의 주요 건축물은 대부분 수도관과 연결돼 있었다. 쉴레이마니예 자미에서도 상수도관은 앞마당의 샤르드반 지점으로 들어와 저수됐다가, 바닥을 통해 자미 본체 안으로 들어가 자미 중심부에서 좌우로 꺾여 외벽으로 물을 공급하도록 설계됐다. 쉴레이마니예 자미의 바깥에는 양쪽 옆벽 아랫부분에 각각 17개씩 수도가 설치돼 여러 사람이 예배 볼 때 손발을 씻고 들어가도록 했다. 건물과 함께 통합 설치된 이 시설은 매우 독특하고 절묘한 디자인이다(사진 6).

    높은 첨탑인 미나레트도 고전기 오스만 시대 첨탑보다 날렵하고 아찔한 높이로 디자인되어 자미 본체와 긴밀하게 통합됐다. 이 탑에 올라 크게 소리쳐 기도자들을 불렀다고 한다. 시난은 쉴레이만이 제국의 10번째 술탄임을 표현하기 위해 6개의 첨탑에 10개의 발코니를 설계했다.

    쉴레이마니예 자미의 경계 벽 밖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다. 오스만 술탄이 지은 자미들은 자미(금요 모스크)와 마스지드(소규모 이슬람 사원에 대한 일반적 명칭)를 기본으로 메드레세, 이마레트, 병원, 목욕탕, 대상(隊商) 숙소, 메크텝 등의 여러 건물이 종종 집합을 이뤘다. 지금은 상당수가 원래 용도가 아닌 상업용 레스토랑 등으로 개조돼 있는 것을 쉴레이마니예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오늘날 ‘퀼리예’라고 부르는 복합적이고 통일된 이 건물군은 동쪽의 이슬람 국가에서와 달리 셀주크 제국 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오스만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메드레세(아랍어로는 마드라사)는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는 대학이다. 쉴레이만 대제 때부터 상위 졸업자들은 핵심관료(일미예)가 되었다. 메크텝은 고아들에게 코란을 가르치는 학교다. 이마레트는 가난한 사람에게 무료로 음식을 배급한 구호소로, 쉴레이만 재위기까지는 종교기관의 핵심 요소였다. 병원도 구호소와 더불어 이 건물군에 포함된 중요한 시설이었다.

    자미 건물群은 사회제도 총체

    규모가 큰 요소로는 ‘카라반사라이’라는 대상들의 숙소가 있었다. 셀주크 제국 시대와 룸 셀주크 시대에는 아나톨리아 반도 교역로에 카라반사라이가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돼 있었다. 카라반사라이는 오스만 제국기에 자미 건물군에 통합됐다. 대상들은 자미 건물군의 마당에 텐트를 치고 숙박하기도 했다.

    이렇게 교육, 구호복지, 교역의 장소가 종교와 통합되어 도시 곳곳에서 주요 거점 노릇을 했다. 오스만 제국기에 이들 건물은 균형 잡힌 통일적 구성물을 이뤘다.

    쉴레이만 대제 때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인 고전기를 통과했다. 그 시기 제국 전체에 건축적 전형(典型)들이 형성되고 확립됐다. 제국이 건축물을 만들고, 건축물은 제국을 지탱했다.

    14세기 후반~15세기 초반의 초기 오스만 시대 건축 유산은 셀주크의 건축 유산과 마믈루크, 티무르의 요소가 결합된 특징을 보인다. 제국의 세 수도였던 부르사, 에디르네, 이스탄불을 차례로 찾아가보면 그 변화 과정을 감지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첫 번째 수도 부르사의 바예지트 1세 건물군(1390~1395)과 비교해보면 고전기의 구성이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기념비적인지 알 수 있다.

    바예지트 건물군에는 자미, 무덤, 학교, 마스지드, 구호소, 욕장 등이 남아 있다. 그 밖에 왕궁, 카라반사라이, 수피 고행자 데르비쉬의 숙소인 자비예도 있었다. 고전기 오스만 건축과 비교하면 전체적인 건물 배치는 기하학적인 틀이 약했다.

    셀주크 건축과 비교할 때 오스만 건축의 통일된 형식은 뚜렷해진다. 그 경향은 당대 서유럽 건축 경향과도 상응하는 것이라 흥미롭다. 오스만과 서유럽은 건축 문화를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인과 예술인들이 왕래했으니 소식과 책자들도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다.

    15, 16세기에 이스탄불과 로마에서는 술탄과 교황들이 고대 유산을 재발견해 장대한 기념비와 도시를 새로 짓는 ‘르네상스’를 추진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서로 경쟁했기에 둘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서로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쉴레이마니예 건물군의 북쪽 모서리엔 누구보다 공이 많았던 궁정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무덤이 있다. 무스타파 사이 첼레비가 묘비문을 썼다.

    오, 그대는 이 세상 거처에 하루 이틀 머물렀소/

    물질 세상은 사람에게 평온의 자리가 되지 못하는 법/

    이 뛰어난 사람은 술탄 쉴레이만의 건축가였고/

    지고한 천국을 닮은 모스크를 지었소/

    왕명을 받아 왕의 수로들을 철두철미하게 지었고/

    흐즐(Hızır)이 되어 세상에 삶의 물길을 텄소/

    그는 숭고한 아치들로 체크메제 다리를 지었는데/

    그 다리는 하늘의 은하수를 닮았소/

    그는 사백 채 넘는 마스지드를 지었고/

    이 절세 거장은 팔십 군데에 금요 모스크를 지었소/

    그는 백수를 넘겨 삶을 마감했으니/

    신이여 낙원의 정원을 그의 안식처로 마련하소서/

    그가 떠난 날을 미천한 사이가 기록하나니/

    시난, 건축가들의 우두머리가 이제 떠났도다/

    젊은이건 늙은이건 그의 영혼을 위해 파티하를 암송하시오//

    -이슬람력 996년(서기 1588년)

    불멸을 위하여

    하기아 소피아 뛰어넘는 불멸의 유산을 쌓다

    <사진 7> 쉴레이만의 헝가리 모하치 원정(1526)을 그린 미니어처 그림.

    시난은 쉴레이만 1세 때 궁정건축가가 돼 30여 년 동안 쉴레이만을 위해 일했다. 그는 1490년경 카파도키아의 카이세리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터키어를 하는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다.

    10대 후반에 오스만 타격대인 예니체리 부대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서 군사시설을 건설하고 유지·보수하는 공병으로 활동했다. 그는 로데스, 벨그라데, 모하치, 빈, 바그다드, 코르푸, 아풀리아, 몰다비아 등 술탄 쉴레이만 대제의 여러 원정전투에 참전해 진급을 거듭했다(사진 7). 1537년, 47세에 제국의 가장 높은 건축가의 지위인 궁정건축가에 오른다.

    시난은 쉴레이만 시기에 이어 셀림 2세(재위 1566~1574)와 무라드 3세(재위 1574~1595) 시기까지 궁정건축가로 활동하다 죽었다. 그는 술탄과 술탄의 가족, 지배층의 의뢰를 받아 제국 전역에 수로와 다리, 마스지드, 금요 모스크 등을 지었다. 그는 이스탄불에만 200여 채의 건축물을 지었다.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 때 페르시아만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다뉴브 강에서 알제리까지의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지배했다. 시난의 활동무대도 그만큼 넓어졌다. 시난의 예술성과 명성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미켈란젤로와 종종 비교되는데 시난의 작업량이 미켈란젤로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시난은 말년에 자신의 건축 작업에 대해 이렇게 구술했다.

    “이 노예, 카이세리의 시난도 각 건물을 지으며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모든 건물은 단연코 신의 도움을 입어, 오스만 왕가의 훌륭한 통치와 너그러운 후원, 우리의 성의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건축보다 더 어려운 예술은 없습니다. 이 존경스러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의롭고 경건해야 합니다.

    견고하지 않은 땅에 기초를 놓아서는 안 되며, 기초를 놓기 시작했으면 건물에 결함이 없도록 살펴야 하고 단단한 기반에 닿게 해야 합니다. 또한 벽기둥, 기둥, 버팀대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위에 돔과 반쪽 돔을 덮어야 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실수 없이 아치들을 결합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에 서둘러서는 안 되며 ‘인내가 승리를 안겨준다’는 말대로 참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의 도움으로 신이 그의 건물에 불멸을 안겨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난은 건축의 견실함과 아름다움을 균형 있게 추구했다. 그의 작품에서 종교적 상징을 담은 뛰어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확인할 때 종교와 사상을 떠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의롭고 경건한’ 건축가 시난은 신의 도움과 인간의 노력과 인내를 통해 완벽하고 우아한 창작물이 불멸에 이르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유럽의 르네상스 건축의 가치체계와도 통하는 것이었다.

    고전기 오스만 시대는 제국의 문화적 힘에 개인의 뛰어난 재능과 헌신이 결합돼 인류문명사상 가장 창조적이고 일관된 문화유산을 남겼다. 시난 시대 이후 제국은 사라졌다. 그의 유산은 종교와 사회의 변동으로 흔들리고 잊혔다. 하지만 불멸의 유산들이 그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의 소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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