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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박사의 ‘왕의 한의학’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산증(疝症)으로 대소변 제대로 못 본 중종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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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중종 초상.

조선의 왕들에겐 각자 믿고 의지하는 의사들이 있었다. 선조 때는 허준이 있었고, 광해군은 허임을 총애했는가 하면 인조는 이형익을 믿고 자신의 몸을 맡겼다.

임금의 신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정보는 나라의 극비 사항에 속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왕의 건강을 챙기고 심기를 안정시키는 의약에 관한 일의 총책임은 당연히 유학자인 사대부의 몫이었다. 내의원 제조라는 직책은, 치료 기술은 의사에게 맡기지만 그 논리적 타당성과 검증은 유학자가 맡아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출발했다.

유학자 이이교(李利敎)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일찍이 술수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다. 점을 치거나 의술을 펴거나 관상을 보는 것, 풍수를 논하는 것은 각각 하나의 기능에 치우친 것일 뿐이어서 심신을 다 보충할 수 없다. 유학은 성현이 준행한 바이며 오직 의리로써 설하였기에 사람이 입문하기에 어렵다.” ‘세상의 중심은 유학’이라고 외친 것이다.

‘약방기생’ 전락한 女醫

대장금(大長今)은 중종(中宗·1488~1544, 재위 1506∼1544)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내밀한 문제까지 치료를 맡긴 여의(女醫)였다. 유학자의 세상, 그것도 남성 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여의 대장금은 어떻게 중종의 신뢰를 얻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은 치료에 관한 세세한 부분은 밝히지 않았으나 대장금이 중종과 얼마나 밀착해 그의 총애를 받았는지에 대해선 기록을 남겼다.

여의가 처음 생겨난 때는 태종 6년. 허도(許)가 건의했다. “그윽이 생각건대,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원하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수십 명을 골라 ‘맥경(脈經)’과 침구(鍼灸)의 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면, 거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태종이 제생원(濟生院)에 명해 동녀에게 의약을 가르치게 한 게 여의의 시작이다. 교육을 마쳐도 여의가 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해 태종 18년 기록에 따르면 7명에 그쳤다. 의녀는 그 능력에 따라 내의녀, 간병의녀, 초학의녀 등 세 등급으로 나뉘었고, 수업 연한은 3년이었다. 내의녀는 진료와 치료를 전문으로 한 사람이다. 간병녀는 간병을 주로 담당했는데, 여기엔 조산의 역할이 포함됐다. 초학의녀는 간병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했다.

여의의 지위는 역대 왕의 관심도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전문성을 위주로 진료하는 여의들을 창기(娼妓)와 같은 자리로 끌어내린 건 연산군이다. 연회에 내의원 의녀를 부르면서 ‘약방기생’으로 만든 것이다. 이후 사대부의 잔치나 관원들의 유희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여의의 제자리 찾기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의녀에 대한 중종의 대우는 파격적이다. 중종 5년엔 연산군 때 생긴 폐습을 없애려고 관원의 연회에 의녀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는 아마 중종과 밀접했던 장금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강이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힘든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중종 30년엔 의녀를 희롱한 사건으로 대사헌 허항이 체직(遞職·벼슬이 갈리는 것)할 것을 왕에게 요청한다. 혜민서 훈도들이 돈을 받고 자신의 형인 제조 허흡이 통솔하는 여의들을 휴가를 보내는가 하면 술을 먹이고 희롱해 대사헌의 체면을 구겼다는 내용이고 보면 법을 시행한 이후에도 약방기생이란 오명은 계속된 듯하다.

“내 증세는 장금이 안다”

여의(女醫) 파격 대우하고 장금에게 내밀한 치료 맡겨

드라마 ‘대장금’. 대장금은 중종이 총애한 여의였다.

한류(韓流)의 중심 드라마 ‘대장금.’ 조선조 당시 여의에 대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드라마 내용이 과장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중종과 장금에 대한 기록은 1515년 중종 10년 3월 8일에 처음 나타난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그해 2월 25일 원자인 인종을 생산하고 위독해졌다가 숨을 거둔다. 이때 장금은 인종마저 위독해지는 상황에서 그를 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관례대로 대간은 장경왕후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히며 벌을 주라고 건의한다. “의녀 장금의 죄가 의원 하종해보다 더 심하다.” 하지만 중종은 그 건의를 물리친다.

1533년 1월 9일 중종은 종기를 앓아 고생한다. 이때 내의원은 장금에게 치열한 ‘견제구’를 던진다. 내의원 장순손은 말한다. “대체로 종기를 앓을 때는 젊은 여자로 하여금 가까이 모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종기가 터진 후에도 더욱 부인들을 기피해야 미더운 일입니다”라면서 장금의 접근 자체를 막고 나선다. 그런 견제 때문이었는지 장금의 진료 기록은 중종의 죽음 문턱에서야 나타난다.

실록에 장금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나타나지만 의료와 관련해 분명한 사실은 중종 39년 10월 26일의 기록이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중종이 미리 문안하지 말라고 한 탓인지 정원이 미안해하면서 문안하고 증세를 묻는다. 중종은 건조한 말투로 대변이 어려워서 처방을 의논하고 있다고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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