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주전부리 달고 산 거구 전방위 지식 탐구도 ‘대식가’

육당 최남선

  • 소래섭│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letsbe27@ulsan.ac.kr

    입력2013-10-18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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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뛰어난 작가는 음식에 관한 식견을 남긴다. 곤궁한 시절에도 마찬가지여서,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 중 하나였다는 육당 최남선도 대식가로 유명했다. 문학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지리학 등 다방면에 능했던 그의 박학다식은 대식가 기질과 일맥상통한다.
    주전부리 달고 산 거구 전방위 지식 탐구도 ‘대식가’
    ‘알렉상드르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라는 긴 이름을 가진 프랑스 남작은 브리야 사바랭과 함께 ‘미식(美食) 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미식연감’이라는 책에서 대식가와 미식가를 구별하며 대식가의 예로 니콜라 토마 바르트라는 18세기 작가를 거론했다.

    바르트는 지나친 식도락에 빠져 사망한 것으로 알려질 정도로 대식가였으며, 독선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식탁 위에 차려진 요리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맛보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시력이 안 좋아 음식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한 가지라도 못 먹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인들을 다그쳤다고 한다. “내가 이것을 먹었나? 저것은 먹었나?…”

    레니에르는 바르트가 소화불량이 악화돼 51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으며, 대식가가 아니라 미식가였더라면 더 오래 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니에르가 보기에 탐욕스러운 식욕은 대식가의 전부일 뿐이다. 미식가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재능이 필요하다. 정확한 판단력, 요리법의 모든 면을 빈틈없이 파악하는 지식, 예민하고 정밀한 미각…. 다른 이에겐 없는 수천 가지 소질이 있어야만 미식가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19세기 독일의 미식가 루모르도 대식가와 미식가를 이렇게 구별했다.

    미식가와 대식가

    “지적 감각이 둔한 사람은 살찌우기 위해 사육하는 동물처럼 기름기 많은 음식으로 양을 채운다. 항상 즐겁고 뭔가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배가 부르지 않으면서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을 좋아한다. 사상이 깊고 명상을 즐기는 사람은 자극적인 향이 없고 소화하기 어렵지 않은 음식을 골고루 좋아한다.”



    레니에르와 루모르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훌륭한 작가는 대식가가 아니라 미식가일 것이다. 물론 프랑스 사실주의의 선구자 발자크는 많은 작가가 먹을 때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지만, 그저 많이 먹는 것만으로 깊이 있는 사상과 날카로운 심미안을 가진 작가가 되기는 어렵다. 모름지기 뛰어난 작가라면 음식에 대해서도 남다른 식견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명망이 있는 작가들은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빼놓지 않고 남겼다.

    朝鮮心 = 잘 먹는 사람의 노래?

    우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곤궁한 시절이건 풍요로운 시절이건 가릴 것 없이 작가들은 저마다 음식에 관한 사연 한 토막씩은 남겨놓았다.

    수많은 근대 작가 중 맨 먼저 얘기해야 할 인물은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이다. 요즘에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작가 정도로 기억되고 있지만, 당시 육당은 조선 문화계를 이끌어가던 거물이었다. 그는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릴 만큼 다방면에서 활약을 펼쳤다.

    육당은 1900년대와 1910년대에 ‘소년’과 ‘청춘’ 등의 잡지를 간행하고 새로운 형태의 시를 선보이며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그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대표되는 신체시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졌다. 한때는 신체시가 근대시의 출발점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전통적인 정형시와 근대 자유시 사이에 놓인 과도기적 성격의 시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신체시가 근대 자유시를 향한 발전의 방향을 선명하게 제시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육당이 없었더라면 우리 근대시가 창작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육당은 미식가보다는 대식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 화가 안석영은 조선일보에 ‘만화자가 본 문인’이라는 글을 연재하며 육당을 대식가로 묘사했다. 그는 육당의 행적이 영 못마땅했던지 이렇게 적었다.

    씨(최남선·인용자)가 항상 창도(唱導)하던 조선심(朝鮮心)에 대하여 근일에 와서는 그 존음(尊音)이 끊겼다. 물론 조선어사전 편찬 감독을 하는 데에 다망하여 그러한지는 모르나 조선심이란 의의가 결국 여기에 끊긴 것인지. 씨는 대식가라 한다. 대식가인 씨인 만큼 근력이 좋아서 좌담을 잘 하고 강연에도 보통 두세 시간이 걸린다 한다. 조선심은 잘 먹는 사람들의 노래인가.

    -안석영, ‘만화자가 본 문인 7 - 대식가 육당 최남선씨’, 조선일보, 1927년 11월 5일자

    일찍이 육당은 새로운 시가 창작과 잡지 간행 등 문화운동과 아울러 우리 고대사 및 문화 연구에도 몰두했다.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등과 함께 당시 우리 고대사 연구에 한 획을 그은 것이 바로 육당이다. 이들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사상을 탐구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나라 만들기’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라고 보았다. 또한 이는 일제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한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역사와 민속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통치 정책의 참고자료를 얻기 위해 실시한 여러 조사 사업에서 시작됐다. 이후에는 총독부와는 별개로 이마무라 도모에, 아키바 다카시 등에 의해서도 학문적 연구가 이뤄졌다. 그들은 정교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객관적 연구를 지향했지만, 거기에는 암묵적으로 식민주의적 시선이 내재했다.

    반대로 육당을 비롯한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연구는 식민 담론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 담론의 일종으로 시작됐다. 그들의 연구는 문화적 동화론을 지지했던 일본 학자들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됐고, 더 나아가 식민지배 문화인 일본문화와는 다른 조선문화의 독자적 기원과 발전을 의도적으로 찾는 작업이었다. 이들은 단군신화, 무속, 토착적 민중문화 등에 주목했다.

    육당은 우리 민족 특유의 정신적 특성을 ‘조선심(朝鮮心)’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1920년대 이후 어디에서든 조선심을 드러내고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의도에서 출발한 그의 조선심 연구는 1927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면서 훼절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에도 여러 경로로 일제에 협력했던 육당은 결국 1949년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된다.

    옥중에서 육당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설명하는 자열서(自列書)를 남겼는데, 반민족행위에 대한 그의 변명은 이랬다. “조선사 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만주괴뢰국 건국대학 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었으나 나는 언제나 시종일관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다.” 아마도 육당이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거나 광복 후 치열한 자기반성의 글을 남겼다면, 육당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대식가라서 다행인 까닭

    주전부리 달고 산 거구 전방위 지식 탐구도 ‘대식가’

    1927년 11월 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화가 안석영이 그린 대식가 최남선의 캐리커쳐.

    안석영은 육당의 이중적 행적을 ‘대식가’라는 말로 비꼬았는데, 실제로도 육당은 대식가였던 듯하다. 안석영에 앞서 1926년 잡지 ‘별건곤’은 육당의 대식가적 면모를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육당은 군것질이 심해서 주머니 속에 늘 호떡, 군밤, 왜콩, 호콩 등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별건곤’의 필자는 육당의 몸집이 점점 비대해지는 것도 군것질 때문인 것 같다고 적었다. 안석영이 그린 육당의 캐리커처를 보면 마치 3등신 같은데, 육당은 대식가답게 몸집도 비대한 편이었다고 한다.

    육당은 음식에 대한 본격적인 글이나 문학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대식가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육당이 우리나라 최초로 창간한 잡지 ‘소년’에서 찾을 수 있다. ‘소년’ 창간호의 맨 앞에 실려 있는 글이 ‘해에게서 소년에게’이고, 바로 이어진 글이 ‘여러분은 뜻을 어떻게 세우시려오’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소년시언(少年時言)’이다. 이 글에서 육당은 어린 시절의 인생 설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음식에 비유해 설명한다.

    대저 경단이나 송편이나 만두나 이것은 다 성형된 뒤에 이름이로되 밀가루나 쌀가루에 물을 타서 뭉친 반죽 때에는 다 같은 반죽이니 아무 분별도 없는 것이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떡반죽 같아서 지금에 뭉쳐 만들면 아무것이라도 될 수 있을 뿐더러 또한 잘못하면 쉬거나 뭉그러져서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말 수도 있는 것이라. 이때 우리가 어찌 조심치 않으리까.

    -‘소년시언’, ‘소년’ 창간호, 1908년 11월호

    청소년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지만, 어쩐지 이 글을 읽노라면 육당의 주머니에 늘 떡이 들어 있었다는 ‘별건곤’의 기사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육당이 1929년 발간한 잡지 ‘괴기(怪奇)’에 실린 ‘기괴한 기호-식욕도착증’이라는 글을 보자. 이 잡지는 ‘괴기’라는 제호와 달리 엄청난 목적을 지니고 창간됐다. 창간호 앞부분에 육당이 밝힌 이 잡지의 의미를 읽다보면 숨이 막혀 질식할 지경이다.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 종교학, 신화학, 신학, 심리학, 윤리학, 심령학, 의학, 성욕학, 천문학, 지리학, 생물학, 인류학, 민속학, 언어학, 사회학, 경제학, 고고학, 사학, 연대학, 천화학(泉貨學), 문자학, 도서학, 금석학, 문학, 미술, 음악 등 일체 문화과학의 통속취미잡지.”

    이토록 원대한 목적을 가진 잡지는 동서고금을 망라해도 드물 것이다. 육당이 밝힌 잡지의 의미는 창간호 목차를 살펴보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신원조사

    인류 문화의 4대 계단

    종교문화의 본원인 ‘마나’ 신앙

    고금동서 생식기 숭배의 속(俗)

    성(姓)과 씨(氏)와 족(族)의 구별

    연초(烟草)의 유래

    신라의 경문왕과 희랍의 미다스왕

    조선과 세계의 공통점

    일천 년 전 해상왕 신라 장보고

    신대(神代)의 대식민가 신라 천일창

    서양 음악의 조선 전래

    세계 무류(無類)의 조선 측후기록

    -‘괴기’ 창간호 주요 내용 발췌, 1927년 5월호



    창간호는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함께 우리의 빛나는 역사와 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데 집중돼 있다. 요즘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단언컨대’ 이 잡지의 의미와 창간호의 목차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육당이 평생을 통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이 무엇인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괴한 기호-식욕도착증’ 역시 세계의 독특한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기획된 글로 보이는데, 통속 취미잡지를 표방했던 만큼 이 글은 ‘고금동서 생식기 숭배의 속’과 아울러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려는 목적 또한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온갖 식욕도착증 환자의 사례를 소개한다. 손톱, 정액, 인분 등을 먹는 괴상한 식습관이 열거되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이러한 것을 의학에서 식욕도착이라 하니, 평소에 싫어하던 식물(食物)을 즐기고 반대로 평소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며, 또 일반인이 기호하는 바를 먹지 아니하는 것 따위가 다 이에 속하는 것이다. 생리적으로는 부인이 임신 시에 평소에 좋아하던 식물을 싫어하고 산성의 것과 기타 이미(異味)를 기호함도 이것이며, 병적으로는 히스테리 및 위황병(萎黃病)의 환자 중에 일반인이 혐오하는 진흙과 지푸라기 등을 먹는 자가 있으며, 이밖에 변질자나 중한 유전소인을 가진 자가 탄지(炭紙), 백묵 등을 먹고, 심하면 개구리, 뱀 등과 벌레를 먹되, 남이 흉볼까 두려워서 몰래 먹는 자가 있으며, 가장 고약한 것은 식분증(食糞症)이라 하여 분변을 좋다고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와 이물을 먹는 자가 반드시 식욕도착이라고 할 수 없으니, 지방을 따라서는 특별한 물건을 먹기도 하며 또 혹 미신으로 일반인이 혐오하는 것을 먹기도 하니, 이를테면 죽은 사람의 살, 어린아이의 살 내지 부녀의 혈액을 먹는 것 등이 그것이다.

    -‘기괴한 기호-식욕도착증’, ‘괴기’ 창간호, 1929년 5월호

    온갖 기괴한 사례가 소개돼 있는 탓에 읽다보면 구토가 쏠릴 지경이다. 그런데도 약간은 변태처럼 보이는 사례들을 소개하는 육당의 문체는 의외로 담담하고 차분하다. 마치 환자를 다루는 의사처럼, 실험 대상을 면밀하게 살피는 과학자처럼, 그의 글은 건조하고 객관적인 어조를 유지한다. 잡지의 원대한 목적에 비하면 생뚱맞은 글처럼 보이기도 하나, 전 세계의 온갖 문화를 소개하려는 잡지의 의도에 비춰보면 그리 유별나 보이지도 않는다. 또한 사소한 사실에서도 역사·문화적 의미를 발견하려 했던 육당의 박학다식한 면모를 엿볼 수도 있다.

    주전부리 달고 산 거구 전방위 지식 탐구도 ‘대식가’


    그런데 어쩐지 ‘괴기’의 원대한 목적은, 마치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는 육당의 대식가다운 면모와 통하는 듯하다. 식탁 위에 차려진 요리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맛보려 했던 바르트처럼 육당도 역사와 문화의 온갖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사후에 간행된 ‘육당 최남선 전집’은 근대의 어느 작가의 것보다도 분량이 방대하고 다루는 주제 또한 광범위하다. 그러니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육당이 미식가가 아니라 대식가였던 것이 다행일 수도 있겠다. 언뜻 사소하게 보이는 현상에도 눈길을 보내려는 노력과 온갖 것을 아울러 하나로 집대성하려는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와 문화 연구의 폭은 지금보다 좁아졌을지도 모른다.

    말하고 일하는 만큼 먹어라

    육당이 대식가였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이지만, 레니에르가 비판한 바르트와는 달리 그는 먹는 데만 탐욕스럽게 집착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먹는 것을 즐기기는 했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오로지 먹는 것에만 매달리진 않았다. 동양의 전통에서 미식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우주의 이치와 중용의 도를 넘는 과식은 경계했던 것처럼, 그는 먹는 것만을 위한 삶을 천하게 여겼다. ‘소년’에 실린 ‘밥벌레’라는 신체시에서 그러한 육당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너희는 개백정은 되어도

    밥벌레는 되려 하지마라

    너희는 거름장사는 되어도

    앵무새는 되려 하지마라

    너에게 밥 먹으라 입주신

    하늘께서 손과 발도 주시되

    입 하나 주시면서 손발은

    둘씩 주신 이치 아나 모르나

    먹기도 적게 하고 말까지

    많이 하지 아니 할 것이로되

    할 수가 있는 대로 손과 발

    놀리기는 쉬지 아니 하여서

    주먹힘 튼튼하게 많거든

    지구라도 때려 부숴버리고

    발길질 뻣뻣하게 잘 하거든

    월중계(月中桂)도 보기 좋게 걷어차

    아까운 일평생을 공연히

    옷밥 씨름 하는 데 쓰지마라

    그러면 거름장사 개백정

    되는 편이 또한 나으리로다

    -육당, ‘밥벌레’ 전문, ‘소년’, 1909년 1월호

    이 작품에서 육당은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밥벌레’라는 험한 말을 던지며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에게 원대한 꿈을 품을 것을 당부한다. 육당은 젊은이들이 육체적 쾌락보다는 문명의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을 입과 손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즉 하늘이 입은 하나만 주고 손발은 두 개씩 주신 이유는, 먹는 것보다는 손과 발을 열심히 놀려 일하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유치하게 보이는 비유이지만, ‘소년’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적절한 비유일 수도 있다.

    적어도 이 시만 보면 “조선심은 잘 먹는 사람들의 노래인가”라는 안석영의 비판은 공연한 시비처럼 보인다. 육당이 이 시에서 당부한 것처럼 “먹기도 적게 하고 말까지 많이 하지 아니하는” 삶을 평생토록 실천한 것 같지는 않지만, 오히려 많이 먹고, 말하고, 일하는 것이 육당의 행적과 더 어울린다. 문제는 식도락에 빠져 다른 일을 제쳐두는 것이지, 말하고 일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 먹는 것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발자크는 이렇게 말했다.

    주전부리 달고 산 거구 전방위 지식 탐구도 ‘대식가’
    소래섭

    1973년 전북 익산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서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및 박사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저서 : ‘백석의 맛’,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시는 노래처럼’ 등


    “우리의 신념과 전혀 관계없는 우리의 이성은 소화 법칙을 따른다. 또한 푸코의 말대로 좋은 생각은 적당히 부른 배에서 나온다.”

    육당에게는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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