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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해석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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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을 먼저 읽기를

조선왕조실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고만 아는 분이 많다. 그러나 실록을 30년 이상 읽어온 학인의 경험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실록은 이름처럼 믿을 만하다. 당파에 따라 달리 기록하는 사평(史評·사론)을 유보한다고 쳐도 사실에 관한 한 실록은 참으로 신뢰도가 높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을 지우고 싶었던 정조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지울 수 있었어도, 실록은 지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실록 기록으로 사도세자의 처분 기사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윤 5월 13일에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 효장세자(孝章世子)가 훙(薨)한 뒤,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疾發喪性]’.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757), 무인년(1758)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갑자기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언제나 종묘사직과 나라를 위해 근심하였다.(‘영조실록’ 권 99, 38년(1762) 윤 5월 13일)

어려서는 똑똑했던 세자가 커가면서 발작하는 병이 들어 인성(人性)을 잃고 사람을 죽였다. 병이 갈수록 악화되었다는 것이 사관의 전언이다. 10여 세 이후부터 그랬으니까, 꽤 오래 이런 양상이 계속됐고 영조가 뭔가 판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비극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사료 비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비극의 진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뒤 영조는 국왕의 덕목과 훈련에 대해 타일렀다. ‘너는 안락한 데서 태어나서 자랐다’ ‘천리(天理)는 멀리 있지 않고 내 마음에 있다’ ‘너는 용렬하니 어렸을 때 힘쓰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쾌(快)라는 한 글자가 너에게는 병통이니 경계하고 경계하라’ ‘음식은 한때의 영양과 맛이요, 학문은 일생의 영양과 맛인데, 배부르고도 체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학문이다’ ‘나는 보통 때 반드시 꿇어앉아 감히 다리를 쭉 펴고 앉지 않는다’ ‘형옥(刑獄)을 경솔하게 처리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것이니 신중히 하고 신중히 하라’ ‘나는 불나방이 날아와 등불에 부딪히는 것을 보면 도랑과 골짜기에서 이리저리 뒹구는 백성을 생각하여 구휼하는 정사를 베풀었다’ ‘사치를 몰아내는 한 가지 절목은 곧 임금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영조실록’ 권69, 25년(1749) 2월 17일).

그러나 사도세자는 영조와 달랐다. 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서연(書筵)에서는 눈병을 호소했다. 영조는 이를 꾀병으로 생각했다. 밥만 많이 먹고, 책읽기는 싫어하는 것, 이것이 문제였다. 답답했다. 답답함은 세자에 대한 무시와 조롱으로 이어졌다. 일 년에 책 읽고 싶을 때가 고작 한두 번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세자에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실제로 세자가 죽기 십 년 전부터 영조는 세자를 거의 포기했다(정병설, 앞의 책, ‘놀고 싶은 세자’).

앞서 살펴본 실록의 사관 기록뿐 아니라 ‘한중록(恨中錄)’ 및 승정원일기에도 세자는 일찍부터 광증을 보였다고 기록돼 있다. 영조도 세자가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선희궁)가 세자의 비행(非行)을 영조에게 알리면서 미쳤으니 선처를 바란다고 했지만, 영조는 ‘세자를 폐위시키는 반교[廢世子頒敎]’에서 “비록 미쳤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처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雖曰狂, 何不處分]”라고 분명히 말했다.

10여 세부터 시작된 세자의 정신불안과 의대증(衣帶症·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병)은 가학증으로 이어졌다. ‘한중록’에서는 세자가 김한채의 머리를 베어 집 안에 들고 들어와 혜경궁 홍씨와 나인들에게 보여줬다고 하였는데, 김한채는 내관이었다. 그전에도 세자는 영조의 꾸지람을 들으면 내관과 나인을 때렸는데, 1757년 6월부터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김한채를 죽일 때 나인도 여럿 죽였다고 하는데, 실록에서는 모두 6명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은 폐세자 당시(1762년) 실록에서 ‘정축년 이후부터 증상이 심해졌다’고 말한 기록과 일치한다. ‘현고기(玄皐記)’에서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세자가 장성하기 이전에 이미 살인을 저질렀다고 한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사도세자 묘지명. 본문 어디에도 영조가 후회하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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