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호

너도 나도 전문가 행세하는 사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

  • 정윤수 문화평론가·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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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20-04-1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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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 때, 동네 재개봉관 극장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지금도 잠시 눈을 감으면 동네극장의 풍경이, 냄새가, 사람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인근 동네의 양복점·금은방·예식장 광고가 이어지는데, 굵고 진하게 그린 약도 위로 화살표가 날아가서 꽉 꽂히면서 “부와 명예의 보화당당다아~~앙” 하던 과장된 성우의 목소리도 환청처럼 들린다. 그때는 그런 극장이 동네마다 참 많았다. 내가 살던 미아리 인근에는 세일, 아폴로, 삼양, 도원, 천지 같은, 화장실 지린내와 또 그것을 상쇄하겠다고 마구 뿌려놓은 나프탈렌 냄새가 강렬한 재개봉관이 많았다. 익숙한 문구를 인용하자면, 나는 인생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동네극장에서 다 배웠다. 

    그 무렵 동네극장에서는 2관 동시 상영을 했는데, 대개 성인물 하나와 무협 영화 하나가 교대로 상영됐다. 까까머리 중학생은 일단 무협 영화할 때 들어간다. ‘소림사 18동인’ ‘소림사 십대제자’ 같은 영화들을 보고나서 후미진 구석이나 화장실 같은 데에 은신하다 보면 ‘가시를 삼킨 장미’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육체의 문’ 같은 영화를 볼 수 있다. 이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곧바로 나가기 쑥스럽다. 교복 입은 중학생이 ‘색깔 있는 여자’라니. 내친김에 무협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것이다.

    어느 무술 연기자의 비애

    이때, 나 나름의 ‘미학적 발견’을 하게 된다. 처음 볼 때와 다르게 화면상의 시간적 줄거리보다는, 그 나름대로 감독이 힘을 준 시퀀스나 이를 지탱하는 플롯을 느꼈다고 하면, 심한 표현일까. 아무튼 줄거리와 대사보다는 그 밖의 요소들에 자연스레 눈이 가게 된다. 조연이나 엑스트라도 주목하게 된다. 

    충무로 영화판에서 오랫동안 관용적으로 쓰인 ‘다치마와리’라는 표현이 있다. 일어 ‘立ち回り(たちまわり)’를 소리 나는 대로 읽은 것인데, 발음을 정확히 해 끊어 읽으면, 다치(서 있다)와 마와리(돌다)가 된다. 여러 명이 주인공 한 사람을 둘러싸서 싸움박질을 하는데, 이때 카메라가 주인공의 시점에서 사방의 적들을 한 바퀴 돌면서 찍는다. ‘장군의 아들’에는 충무로에서 전쟁 영화, 액션영화를 두루 거친 ‘임권택 다치마와리’의 명장면들이 담겨 있다. 

    그 시절, 재개봉관의 무협 영화나 그 무슨 깡패 영화를 보면 어김없이 다치마와리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 볼 때는 주인공의 화려한 액션이 눈에 들어오지만, 다시 보게 되면 얻어터지는 조연뿐만 아니라, 발길질 한 번에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무술 연기자까지 눈에 들어온다. 어떤 사람은 주인공의 주먹이 닿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감싸고 쓰러진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인공의 발에 맞긴 맞았는데 그 화력을 몸소 증명하느라 바위로 달려가 부딪친다. 내 생각에 그는 그 충격으로 죽어버린 듯싶다. 



    아, 그리고 생각난다. 물론 영화 제목은 잊었다. 세월이 오래된 탓도 있지만, 그때 하도 많은 영화를 뒤죽박죽으로 봐서, 정확히 무슨 영화인지 특정하기 어렵다. 이소룡·성룡만 유명한 게 아니고 거룡이나 여소룡 같은 분들도 대단했거니와 그 밖에도 숱한 무술 영화, 깡패 영화가 있었는데, 그 어느 장면에서, 무술 연기자 한 분이 주인공한테 얻어맞고는 붕 날아가 떨어졌는데, 하필이면 바닷가였다. 파도가 밀려오니까, 그분이 춥기도 해서 슬금슬금 모래밭으로 이동했다. 한 대 맞고 죽었는데, 아차 그만 바닷물은 차갑고, 그래서 그는 조금씩 기어서 바닷물이 닿지 않은 모래밭에 엎드려, 다시 죽었다. 나는, 뭔지 모를 감정에 잠깐 사로잡혔다. 비애, 라고 하면 과장일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일순간 나를 감쌌다. 


    영화 ‘대부’의 명품 조연

    코로나19 사태 이후,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개학이 연기되면서 진실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어떤 막막함인지를 몸소 느끼는 2020년이다. 일상이 ‘정중동’의 긴장 속에서 느리게, 멈춘 듯 흐르고 있는데, 동행자가 한 놈 붙어 있다. 재수 끝에, 자기가 원하는 학과에 입학한 아들 녀석도 개강이 늦춰지는 바람에, 신입생이 아니라 재수생 연장전을 벌이고 있다. 둘이서 밤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늦잠을 자는 헝클어진 일상을 견디다 못해서, 자, 이번 기회에 인류사 불멸의 ‘70미리올로케파나비죤울트라걸작명작’들을 섭렵하자고 다짐하고는 영화사의 고전들을 함께 봤다. ‘시민 케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지옥의 묵시록’ 등등. 그리고 ‘대부’, 특히 ‘대부’! 

    아들 녀석은 그 또래의, 그 세대 나름의 생각으로 봤을 테고, 내 경우는 어땠느냐 하면, 역시 줄거리나 주인공은 다 아는 영화고, 특히나 대사들까지 외다시피 한 것이므로, 자연스레 카메라의 움직임, 사물들의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 명품 조연, 리처드 브라이트를 주목하게 됐다. 2006년 2월, 뉴욕의 맨해튼 인근에서 비운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 배우는, 꽤 많은 쾌작의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온 배우인데, 역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대부1’의 중반 이후다. 새로이 권좌에 오르는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의 경호원으로 등장해 비밀 임무(주로 주먹 가격, 총격 암살)를 수행하면서 ‘대부3’에 이르러서는 권력 2인자에까지 오르는 캐릭터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

    잉글랜드 리버풀FC 위르겐 클롭 감독.

    잉글랜드 리버풀FC 위르겐 클롭 감독.

    그가 ‘대부1’의 중반 이후 등장해 보여주는 연기는, 그야말로 명품 조연이라는 말을 유일하게 써야 한다면 ‘바로 이 사람이다’ 할 만큼 정교하다. 아예 대사 한마디 없다. 오직 알 파치노 옆에서 문을 열어주고, 술잔을 가져오고, 의자를 꺼내주고, 다시 문을 닫고 하는, 거의 사물처럼 연기한다. 그 위치가 정교하고 그 연기가 묵직하다. 인생사에 빗대어, 주연이 아니라 조연의 삶도 귀하다고 할 때, 만약 그 시각 자료가 필요하다면 ‘대부1’의 리처드 브라이트를 함께 봐도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 사회는 ‘엇다대고 사회’이며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사회’다. 인간적 존중이 아니라 신분적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마음 깊은 환대가 아니라 격식과 의전을 받고 싶어 한다. 남의 말을 정성껏 듣기보다 마이크 잡고 장광설을 늘어놓기 좋아한다. 

    특히나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 그래서 뭔가 좀 이뤘다는 사람들, 그랬는데 제 욕심을 완전히 다 이루지는 못한 듯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사방팔방에 원로입네, 전문가입네, 관계자입네 하며 인터넷을 급히 검색해 인지한 정보를 마치 대단한 정보이고 의견인 양 제시하며 강변한다. 그 거친 욕망의 뿌리에는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는 강렬한 인정 욕망과 그것이 조금이라도 뒤틀렸을 때 ‘네까짓 게 엇다대고 말이야’ 하는 뒤틀린 억하심정이 배어 있다. 

    내가 ‘최애극존’하는, 잉글랜드의 리버풀FC 위르겐 클롭 감독이 3월 3일(현지 시각), 첼시와의 FA컵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인상 깊은 말을 남겼다. 기자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팀이나 당신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클롭 감독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떤 심각한 일이 발생했을 때, 축구 감독의 의견을 묻는 것”이라고 입을 뗐다. 대개는 “구단에서 다각도로 대비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클롭 이 사람은 직진형이다. 그는 말한다. “유명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 나처럼 지식 없는 사람들이 얘기해 봐야 뭐 하나. 그런 건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 문제에 관한 한) 난 야구 모자를 쓴, 지저분한 수염을 기른 아저씨에 불과하다.” 

    공자님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지금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리처드 브라이트처럼 자기 자리에 정확히 서 있는 것, ‘코로나19’에 대해 그 분야 최고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 아니 긴급 사태이므로 그분들의 명령을 따르는 것. 앞으로도 그렇다. 인터넷 검색하면 10초 안에 알 수 있는 것, 심지어 가짜 뉴스 대강 읽고서는 온갖 미디어에 인터넷까지 종횡하며 전문가 행세하는 사회, 이거 정말 큰일 날 일이다.


    정윤수
    ● 1967년 출생
    ● 문화비평지 계간 ‘리뷰’ 편집위원
    ● 인문예술단체 ‘풀로엮은집’ 사무국장
    ● 동아일보 축구 칼럼니스트
    ● 現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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