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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해석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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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 발생한 쇼킹한 사건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사도세자의 죽음을 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넣어서 죽인 사건이니 세간의 눈으로 보면 인정(人情)을 넘어선 엽기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정말 엽기적인 사건이었을까.
  •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 겉으로 보이는 엽기성에는 역사성이 있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창덕궁 영화당에서 서연관(왕세자의 스승)들이 사도세자(오른쪽)가 영조(중앙)에게 배운 내용을 평가받는 ‘회강(會講)’을 재현하고 있다.

이 지면에서 다룬 적이 있는 주제인데, 사람들은 언뜻 상식으로 보아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걸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는 경우가 그렇다. 많은 사람이 납득할 수 있고,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사건이 생기면 합리적인 이유를 찾는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실제로 이상한 사람, 웃기는 사람, 때로는 미친 사람이 존재한다. 그들이 빚어내는 이상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있다. 그럴 경우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거부하지 말고 ‘아,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인정하는 일도 역사 공부의 중요한 첫걸음이다.

사도세자의 뒤주 죽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아무리 아들이 잘못했기로서니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이다니…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비극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세자의 광증(狂症)이 사료 곳곳에서 발견되는데도 광증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융건릉에 대한 문화재청의 공식 설명에서도 그 흔적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1762년 윤(閏)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영조가 후회했다고?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정병설의 책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종합 연구서라 할 만하다.

이 설명 중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 대목에 주목하자.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으니, 나중에 후회했다고 생각하나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린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서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명을 본 적이 있다. 묘지명은 죽은 사람을 기리는 글로, 묘비와는 달리 무덤에 함께 묻는 물건이다. 영조가 쓴 묘지명은 모두 5장의 자기(瓷器)였다. 대충 읽어보아도 ‘오호(嗚呼)’라는 말이 10번은 나온다. 하긴 아버지가 자식을 뒤주에 넣어 죽은 사건이니, 사정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탄식이 먼저 나오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조의 ‘후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묘지명은 무덤을 만들던 임오년에 쓴 것이다. 바로 1762년 영조 38년의 일이다. 그해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었는데 훗날 이를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부른다. 묘지명에는 사도세자가 영조 11년(을묘년 1735) 정월 21일에 태어났다는 말, 영빈(暎嬪) 소생이라는 말도 적혀 있다. 영빈은 이 씨다. 죽은 뒤 폐세자됐던 그를 다시 세자로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영조가 살아 있을 때 이 처분을 후회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다만 묘지명의 다음 대목은 오해를 가져왔다.

강서원에서 그 여러 날 너를 지킨 이유는 무엇이었겠느냐.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고,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참으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거늘, 아흐레째 되던 날 피치 못할 보고를 들었도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일흔 살 먹은 지 애비를 이런 지경에 처하게 한다는 말이냐.[講書院多日相守者何 爲宗社也, 爲斯民也. 思之及此, 良欲無聞, 逮至九日, 聞不諱之報. 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

그런데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잘못 읽었다.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 백성을 위한 것이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쳐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구 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노라.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김울림, ‘휘경동출토백자청화어제사도세자묘지명’, 미술자료 66, 국립중앙박물관, 2001, 110쪽. 정병설, ‘권력과 인간-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왕실’, 문학동네, 2012에서 재인용)

앞 문장에 걸리는 의문사 ‘하(何)’를 뒷 문장인 ‘위종사야(爲宗社也)’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읽은 데서 당초 오해가 시작됐다. 묘지명에서도 나왔지만 9일 동안이나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놓았다. 앞에 소개한 오역대로라면 영조는 망령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영조는 망령이 나서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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