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려니 숲.
현빈과 하지원이 출연한 인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주인공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그만 부주의로 길을 잃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곶자왈이다. 그 장면 때문에 관광객들이 자전거를 타고 곶자왈을 무슨 익스트림 스포츠 출전 선수들처럼 질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조리 금지되어 있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들의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래도 드라마의 주인공들 앞에 신비스러운 ‘시크릿 가든’이 펼쳐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휴대전화는 터지지 않고 끝없이 수풀 속을 헤매게 된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은 정해진 코스대로 소박하게 걸으면서 숲의 청량함과 그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고 숲 속으로 항진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깊은 밤에 만난 내 친구도 “거기 한번 잘못 들어가면 못 나와. 여기 사람들만 어찌어찌 해서 나올 수 있지, 육지 사람들은 큰일나는 거야”라고 말했다.
여름에 가슴 아픈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제주도의 끔찍했던 4·3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 그 영화에 ‘큰넓궤’라는 곳이 나온다. 큰넓궤가 바로 이 일대 곶자왈이다. 크고 작은 오름과 또 그 사이로 수많은 나무가 우거져 깊은 숲을 형성하고, 다시 그 속으로 궤(작은 굴)와 동굴과 계곡과 습지가 형성된 곳이기 때문에 4·3 때 이곳 사람들은 곶자왈 속으로 피했다. 육지에서 온 군대와 경찰은 곶자왈에서 길을 잃었고 여기 사람들은 곶자왈 깊은 곳의 크고 작은 굴에서 목숨을 구하고자 했다. 다급한 상황이기에 곶자왈 속으로 피신을 했으나 보통 때에는 제주도 사람들도 곶자왈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육지 사람들은 큰일나는 거야”
영화 ‘지슬’을 보고 나면 제주도를 ‘가벼운 마음’으로 왕래할 수는 없을 듯해 영화를 안 보든지 제주도를 안 오든지 하려고 했으나, 그런 사소한 결심은 다 사라지고 나는 ‘지슬’도 보았고, 또 영화가 슬프게 기록했던 곶자왈에도 오게 되었다. 그래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제주도의 남서쪽을 벗어나 동북방으로 향해 중산간 길을 따라 한 시간이 채 안 되도록 천천히 달려 사려니 숲으로 갔다. 여러 번 제주도에 와서 다닌 길이었으되 유독 사려니 숲과는 인연이 멀었다.
살짝 열린 사려니 숲

게스트하우스 ‘물고기나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려니 숲이 있다. 숲의 생태를 보존하기 위해 오랫동안 비공개로 보호해온 지역이다. 그래서 나도 몇 차례 제주도에 왔으면서도 그곳에 스며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제주 올레 여행’을 시작으로 소박한 힐링과 그윽한 치유를 바라는 사람들이 찾게 되었고, 마침 숲의 생태를 보존하는 방식이 탄력적으로 변하면서, 마침내 사려니 숲길도 열리게 되었다. 시기를 조율하고 탐방 인원도 제어해가면서, 넓은 숲을 부분적으로 공개하는 방식이다. 사려니 숲은 ‘요존(要存)국유림’이다. ‘공익상 국유로 보존할 필요가 있는 산림’이라는 뜻이다. 큰 틀에서는 비공개로 통제해 보존하되 부분적으로는 산책하고 소요할 수 있도록 공개하는 방식이다.
사려니 숲은, 우선 그 이름 때문에 평소부터 애틋했다. 뜻을 알고 나면 조금은 싱겁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게 제주도의 지역명이거니와, 일단 음운으로서 ‘사려니’는 다정다감하고 안온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뜻을 찾아보니 ‘산의 안’이라는 뜻의 ‘솔아니’가 변한 말이 ‘사려니’라는 설도 있고, ‘신성한’ 또는 ‘신령스러운’이라는 뜻의 ‘살’ 혹은 ‘솔’이 ‘사려니’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다. 그 뜻을 알기 전부터 ‘사려니’라는 음운에서 미묘한 일렁거림을 느꼈던 것이 과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한라산의 안쪽, 그 깊고 신성한 숲, 바로 사려니 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