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 터 잡은 게스트하우스 ‘물고기나무’
가기 전에 작업실의 책들을 정리했다. 장정일의 책 중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책이 있는데, 내 작업실에도 장차 버려질, 그런 신세가 될 책들이 없지 않았다. 한두 해 묵혀두고 나면 정리해야 할 책이 쌓이게 된다. 대개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구하거나 빌려왔다가 그만 작업실 구석에, 다른 책들 위에 얹혀 있다가, 또 다른 책의 받침이 된 책들, 그것부터 먼저 골라냈다.
“책이나 있으면 좀 보내 줘”
동네 편의점에 가서 종이 박스 4개를 들고 왔다. 먼저 골라낸 책들을 박스에 차곡차곡 넣고 두 번 세 번 테이프로 마감을 했다. 그래도 솎아낼 책들이 또 있다. 서가에 안착한 책들 중에서도 다시 방출당하는 신세가 되는 책들이다. 다시는 읽지 않게 되거나 어떤 이유로든 시의를 다 마친 책들이 운 좋게 서가의 빈틈을 차지한 셈인데,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엄선해보니 또 박스가 네댓 개는 필요할 듯해 다시 편의점으로 가서 종이 박스를 더 구해왔다.
“뭐, 딴 건 필요한 거 없어. 안 보는 책이나 있으면 좀 보내줘.”
친구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낯선 제주도, 그 아랫마을 서귀포 표선면 삼달리에 정박하게 된 친구의 집을 위해, 어찌 하다보니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도 더불어 짓게 되었다는 친구의 소박한 ‘사업’을 위해, 나는 책을 부치기로 결심했다.
모두 여덟 개의 박스로 책을 다 갈무리한 후, 책 먼지 묻은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쥐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이 대도시를 떠나서, 작은 마을, 그곳이 농촌이든 어촌이든, 지리산이든 제주도든, 정말 훌쩍 떠날 수 있을까. 내가 말이다. 옛 마을 공동체의 서정이 깊이 남아 있는 소백산자락의 농촌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면서도 과연 내가 이 서울을 벗어나 외진 곳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도 하고, 또 사실 큰 흥미도 없다.
친구는 감행했다.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는데, 결연히 서울을 떠났고, 궁하면 통한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서귀포 표선면의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더니, 결국 제 집을 짓고 말았다. 축하할 만한 일이다. 나는, 우선 여덟 개의 책 상자부터 내려보내고, 곧 그를 만나러 제주도로 떠났다.
마침, 기나긴 추석 연휴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며칠 제주도에 내려갔다가 올라와도 명절 준비에 지장이 없을 만큼 긴 연휴였다. 그래서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꼭 한번 소요하고 싶었던 몇 개의 숲부터 찾아다녔다.
우선, 아차 하면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서귀포시 안덕면의 화순 곶자왈. 이 일대가 요즘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곶자왈 하면 화순 쪽이 꼽힐 정도가 되었지만 곶자왈은 특정 지역명이 아니라 제주도의 독특한 숲이나 지형을 뜻한다.
열대, 한대 섞인 곶자왈
곶자왈은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제주도의 숲과 지형을 가리킨다. 나무, 덩굴식물, 암석 등이 뒤섞여 조금은 어수선하게 형성된 지형 말이다. 숲을 뜻하는 ‘곶’과 수풀이 우거진 곳을 뜻하는 ‘자왈’이라는 제주도 말이 합쳐진 것이다. 이렇게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하나의 숲이 되고 그윽한 지형이 되어 혼거하는 형태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이런 곶자왈이 제주도에 크게 4개 지역이 있다. 한경-안덕 곶자왈 지대, 애월 곶자왈 지대, 조천-함덕 곶자왈 지대, 구좌-성산 곶자왈 지대가 그것이다. 원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곶자왈뿐인가. 제주도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산이자 숲이자 나무였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은 사람이 살 만한 곳에서만 살았다.
그런데 관광으로 길이 나고 개발로 건물이 들어서면서 크게 잡더라도 스무 개 이상이던 곶자왈 숲이 다 사라지고 큼직한 것으로만 쳐도 이제 겨우 네 개 남은 상태다. 나머지는 모두 확·포장된 도로가 되고 황량한 골프장이 되고 쓰레기 매립장이 되었다. 최근 들어 제주도는 ‘곶자왈 도립공원 2단계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것이 숲을 지키는 일이 될지 아니면 수많은 관광객의 등산화며 운동화에 훼손되는 일이 될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