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은 1978년 베를린의 동독 학술아카데미 산하 물리화학연구소에 취직했다. 좁고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청춘을 보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원자핵의 붕괴반응에 관한 논문을 준비한 그는 1986년 1월 이에 관한 박사논문을 완성한다. 당시 이 논문을 화학자 요아힘 자우어 박사가 감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고향(동독)과 직업(과학자)이 같은 두 사람은 몇 년간 동거한 뒤 1998년 12월 결혼했다. 둘 다 재혼이었다.
메르켈에겐 자녀가 없다. 정치에 투신했을 때가 서른다섯이었고 이후 아이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게 이유다. 남편과의 금실은 매우 좋다. 아무리 바빠도 남편의 아침식사를 직접 챙긴다. 자우어 박사 또한 아내의 정치활동을 묵묵히 지원했다. 메르켈은 총리 당선 이후에도 관저에 들어가지 않고 남편과 살던 사저에서 살고 있다. 사저의 문패에는 다른 표시 없이 남편의 이름(Dr. Sauer)만 달려 있다. 3선 총리의 여전히 소박한 면모다.
콜과의 만남과 결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통일 독일 출범이 눈앞에 다가오자 메르켈은 신생 야당 ‘민주변혁’의 문을 두드린다. 학자로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학창 시절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낭송하다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새로운 사회를 직접 건설하고 싶은 열망에 불탔던 메르켈은 박사학위 소지자였음에도 전단지 배포, 사무실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자처했다.
민주변혁당 당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볼프강 슈누어 당수가 비밀경찰 슈타지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이 와해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다시 연구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그는 신선한 인물을 찾고 있던 독일 정계의 거물 헬무트 콜 총리 겸 기민당 당수에게 발탁됐다.
1982년부터 1998년까지 16년간 집권하며 통일을 이뤄낸 콜 총리는 단지 독일뿐 아니라 자유세계의 리더로 추앙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동독’과 ‘여성’이라는 메르켈의 두 가지 제약이 오히려 통일 독일의 정치인으로는 큰 장점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메르켈은 1990년 대표적 보수 우파 정당인 기민당에 입당한다. 통일 당시 신용카드 사용법을 배워야 했을 정도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법을 낯설어했지만, 오랜 동독 생활은 그에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심어줬다. 메르켈은 같은 해 통일 후 처음으로 구성된 연방의회 선거에서 하원의원에 뽑혔다.
콜 총리는 뚝심이 있으면서도 진중한 메르켈을 아꼈다. 메르켈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나의 소녀(mein Madchen)’라는 애칭으로 그를 불렀을 정도다. 콜은 1991년 37세의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기용했고 1994년에는 환경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젊은 나이에 주요 장관직을 역임한 메르켈은 1998년 기민당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이 됐다.
메르켈의 정치 역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0년대 후반 기민당과 콜 총리는 고난을 겪고 있었다. 콜이 총리 재직 당시 약 200만 마르크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론의 십자포화에도 콜은 끝내 기부금 제공자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기민당 내부에서는 콜을 압박하지 못했다. 콜 때문에 당이 존폐 위기에 몰렸지만 ‘누가 호랑이 목에 줄을 걸겠느냐’며 쉬쉬했다.
이때 메르켈이 나섰다. 그는 1999년 12월 22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에 실명 기고라는 ‘대형 폭탄’을 터뜨렸다. “콜의 시대는 영원히 갔다. 기민당은 이제 콜 없이 혼자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부금 제공자를 밝힐 수 없다’는 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기민당은 발칵 뒤집혔지만 독일 국민은 환호했다. 결국 기민당의 보수적 중진들도 난관을 타개할 사람은 메르켈밖에 없다는 데 공감했다. 비자금 스캔들에서 당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인 콜의 사퇴를 주장할 정도로 담대한 리더십은 2000년 메르켈을 기민당 최초의 여성 당수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성에다 동독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내 반대 세력의 견제도 엄청났다. 2004, 2005년에는 사무총장 등 일부 중진들이 연이어 반기를 들고 그의 대표직 사퇴를 종용했다. 그래서 메르켈이 기민당 당수로 뽑혔을 때만 해도 그가 5년 후 독일 총리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자금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기민당 지도부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내놓은 ‘얼굴 마담’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메르켈은 2005년 5월 좌파 계열의 사회민주당(사민당)이 무려 39년간 집권해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선거에서 기민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는 독일의 16개 주 중 인구밀도와 GDP가 가장 높은 곳이라 독일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산업과 교통이 발달했고 통일 이전 수도 본을 비롯해 쾰른, 뒤셀도르프, 도르트문트 등 주요 도시가 모두 이곳에 있다.
여성 지도자 시대 열다
텃밭을 내준 사민당 당수이자 3선을 노리던 당시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했다. 슈뢰더 총리는 2006년 9월로 예정된 총선을 1년 앞당기는 조기 총선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결과는 나빴다. 메르켈은 실업률 상승 등 사민당 슈뢰더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를 집요하게 부각하고 기민당의 경제회생 정책을 집중 홍보하면서 정열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막판 TV토론에서 메르켈이 노련한 슈뢰더에 밀리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며 사민당이 재집권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으나, 일자리를 강조한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결국 제1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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