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성범죄는 강력한 처벌만이 능사?

  • 입력2013-10-22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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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역범은 밤길을 혼자 걷던 하의수를 강제로 납치해 성폭행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하의수는 남자로 태어났으나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이었다. 하의수는 강역범을 강간죄로 고소했다.

    #2 나마초는 부인으로부터 거듭 잠자리를 거부당하자 하루는 술에 취한 채 귀가, 거부하는 아내에게 완력을 행사해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 아내는 나마초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강간으로 형사고소를 했다.

    최근 4년간 전체 범죄 건수도 줄었고 살인, 강도와 같은 강력범죄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강간, 강제추행과 같은 성범죄는 큰 폭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09년 1만5693건이던 성범죄 수는 2012년 1만9670건으로 늘어나 증가율이 25%에 달했다. 2012년 기준으로 하루 53.8건, 매시간 2.2건의 성범죄가 발생하는 셈이다. 성범죄 중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성범죄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자.

    강간은 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성관계를 한 때에 성립하는 범죄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강간의 가해자는 육체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남자이고, 피해자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구형법 제297조는 강간죄를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행위’라고 정의해 이러한 고정관념을 공식화했다. 여기에서 ‘부녀’는 부인 또는 여자를 의미했다.

    이 때문에 남자가 남자를 강간한 경우에는 강간죄가 성립할 수 없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여자가 사회적 권력을 이용한 협박을 통해 남자를 강간하는 사건이 심심치 않게 생겨났지만, 이 경우에도 강간죄로 처벌하지 못하고 형량이 훨씬 낮은 강제추행죄로만 처벌했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해도 형법에 정하지 않은 것을 형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죄형법정주의 원칙과 유추해석금지의 원칙 때문이다.



    강간죄의 대상을 여자로 한정한 법규정으로 인해 생겨난 중요한 쟁점이 바로 성전환자에 대한 성범죄다. 성전환수술을 받고 여자의 외모를 지니게 됐지만 성염색체로나 법적 지위로 남자인 사람을 여자인 줄 알고 강간했다면 범인을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였다.

    남자도 강간당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어떤 사람의 생물학적 성과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성이 다른 경우 그 ‘성(性)’을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할 것이냐 하는 어려운 물음을 던졌다. 종전에는 태어난 상태, 즉 생식기가 무엇인지 혹은 성염색체로 성별을 구분하는 생물학적인 기준이 그대로 통용됐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생물학적 성 이외에도 당사자가 귀속감을 느끼는 성,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성을 기준으로 성별을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 변화는 1990년대부터 법원의 판결에도 반영됐다. 법원이 생물학적 요소 이외에도 심리적, 정신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성을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법원은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사건에서 생식능력, 즉 임신 가능성을 성별 결정기준에 포함시켜 부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후 여자로 알고 강간을 범한 자를 피해자가 성전환수술을 했다는 아주 우연한 사실 때문에 다른 강간범보다 훨씬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느냐는 문제가 계속 제기 됐다.

    그러던 중 2009년 처음으로 성전환자를 강간죄의 객체로 인정한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 30년 전에 성전환수술을 받은 이후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던 ‘남자’를 강간한 사건에서 대법원은 “피해자가 성장기부터 남성에 대한 불일치감과 여성으로 성 귀속감을 나타냈고, 성전환 수술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신체와 외관을 갖추었으며, 수술 이후 30여 년간 개인적, 사회적으로 여성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해가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사회통념상 여성으로 평가되므로 강간죄의 객체인 ‘부녀’에 해당한다”고 판결해 강간죄의 성립을 인정한 것이다(2009. 9. 10. 선고 2009도3580 판결).

    사실 이러한 논란은 강간죄 조항의 ‘부녀’라는 단어만 ‘사람’으로 고치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국회가 형법을 개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2012년 12월 개정된 형법 제297조 강간죄 조항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로 바뀌었고, 이 법은 올해 6월부터 시행됐다.

    구형법 강간죄 조항의 ‘부녀’에는 기혼녀, 미혼녀는 물론이고 음행을 상습으로 하거나 영업으로 하는 소위 윤락여성도 포함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법률상 처(妻)가 포함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현행 형법은 ‘부녀’가 ‘사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범위에 법률상 처가 포함되는지는 여전히 유효한 쟁점이다. 앞으로는 법률상 남편이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다툴지도 모른다.

    대법원이 인정한 부부 강간

    법률상의 처를 다른 ‘사람’과 달리 봐야 한다는 논리는 ‘부부’라는 특수한 지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법은 부부에게 상호가 동거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고, 법원은 동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이혼 사유로 인정하고 위자료까지 물어주라는 판결을 내린다. 이와 같이 배우자는 상대 배우자에게 동거 의무를 부담하는 유일한 사람이고,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동거 의무 위반이 될 소지가 있는 특수성이 있다. 게다가 형벌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형법의 보충성 원칙 때문에 법률상의 처는 강간죄의 대상인 ‘부녀’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다.

    반면 형법이 처와 일반적인 사람을 구별하고 있지 않고, 민법상 부부 동거 의무가 있더라도 이것을 근거로 처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법률상 배우자라고 하더라도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우리 법원의 시각은 어떨까.

    부부강간죄를 다룬 최초의 대법원 사건은 1970년에 있었다. 처가 다른 여자와 동거하고 있는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간통죄로 고소했다가 다시 새출발하기로 하고 남편을 상대로 한 소송과 고소를 취하했는데, 그 후 남편이 부인을 강제로 간음한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이 부부에게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설사 남편이 강제로 처를 간음하였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970년 이 판결 이후 2013년까지 대법원은 줄곧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존재하는 한 법률상의 처는 강간죄의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2008년 부부간 강간죄를 인정한 대법원 판례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 사안은, 남편이 부인과 협의이혼하기로 합의하고 협의이혼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한 이후 부인을 강간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부부간에는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없었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있는 것을 전제로 강간죄를 인정한 1970년 대법원 판결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올해 5월 16일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1970년 판결을 변경했다. 대법원의 논리는 이렇다. “헌법이 보장하는 혼인과 가족생활의 내용, 가정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의 변화, 형법의 체계와 개정 결과 등을 보면 실질적인 혼인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도 남편이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아내를 간음한 경우에는 강간죄가 성립한다”(대법원 2013년 5월 16일 선고 2012도14788 사건). 한마디로 줄이면 ‘세상이 변했고 따라서 판례도 변한다’는 것이다.

    유사강간죄 신설

    개정 형법의 강간죄 조항 바로 다음에는 유사강간죄라는 항목이 신설됐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구강, 항문 등 신체(성기는 제외)의 내부에 성기를 넣거나 성기, 항문에 손가락 등 신체(성기는 제외)의 일부 또는 도구를 넣는 행위를 유사강간죄로 분류해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강간죄는 피해자의 성기에 자신의 성기를 넣어야 성립하기 때문에 성기가 아닌 신체의 일부에 범인의 성기를 넣는 범죄에 대해 신체를 더듬는 정도의 행위를 처벌하는 강제추행죄를 적용하는 불균형이 있었던 데 대한 반성으로 신설된 범죄다.

    이번 개정 형법에서 강간죄의 형량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개정 전과 같다. 이에 대해 성범죄의 형량이 강화되기를 바라는 측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최근 조두순, 김수철, 김정덕 등 잊을 만하면 터지는 강력 성범죄 사건 때마다 범인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 현실에서 성범죄 엄벌주의에 힘이 실렸다. 이런 여론에 의해 실제로 법률의 형량이나 실제 선고되는 형량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범인에 대한 형량을 높이면 여성 인권에 대한 보호가 충실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지는 냉정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강력범죄의 끝은 살인죄다. 일반적인 범죄의 형량을 정하는 기준도 살인죄가 된다. 성범죄가 아무리 간악하더라도 살인죄보다 무겁게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인데, 성범죄를 엄벌하자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범인에게 살인죄와 큰 차이가 없는 처벌을 한다고 해보자. 여론은 피해자의 원한을 갚은 것인 양, 정의가 실현된 것처럼 환영할 것이다.

    성범죄는 강력한 처벌만이 능사?
    그러나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보자. 그 이후의 성범죄 사건에서 강간으로 끝낼 계획이었던 범인이, 피해자에게 얼굴이 노출돼 발각될 경우 살인죄나 별 차이 없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해 피해자를 아예 없애기로 마음먹고 살인까지 저질러버리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강력한 처벌이 강력범죄를 야기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직접 피해자가 아닌 제3자의 분노나 정의감 해소를 위해 정작 직접 피해자의 피해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점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피해 여성에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다.

    개정 형법이 강간죄의 형량을 가중시키지 않은 데에는 성범죄 엄벌주의가 낳을 수 있는 부작용도 충분히 고려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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