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문체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만 완성된 단편소설이다. 구성을 보면, 다섯 개의 ‘Q&A’와 ‘그리고 다시 Q’로 이루어져 있다. 일명, 응답(문)체 또는 상담(문)체. 최소연의 질문에 김 박사가 응답하는 방식으로 최소연이라는 인물이 현실에서 안고 있는 문제(사건)가 노출되고, 이 사건(에피소드)이 전개되면서 이야기는 하나의 길(최소연의 문제)로 흐르다가 두 갈래(최소연과 어머니의 문제), 세 갈래(최소연과 어머니와 아버지의 문제)로 점점 번져나간다.
이야기의 줄기를 하나로 모아보자면, 임용고시 재수생 최소연은 어느 날 이상한 증세, 곧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 욕설이 귀에 들리고 울리는 현상으로 괴로워하는데, 그것의 진원지는 교사로 반듯한 말만을 해온 어머니였고, 어머니가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내뱉은 욕설의 진원지는 아버지였음을 추적해가는 과정이다.
A (…) 어머니 또한 상처받은 영혼이 분명합니다. 오래전 어머니가 학교 운동장에서 수첩을 들여다보며 욕을 했을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치유되지 않고 붕대에 감겨 있다가 최소연 씨로 인해 다시 세상에 삐죽, 튀어나온 것일 겁니다. 어쩌면 그것은 어머니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일, 그것만큼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데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보다 정면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상, 김 박사였습니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 중에서
이야기는, 인류의 흐름과 똑같이, 스스로 증식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야기를 어떤 그릇에 얼마나 담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는 호흡과 분량, 그리고 형식(플롯)의 차원에 해당된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단편 양식이므로, 최소연의 Q와 김 박사의 A를 다섯 번 진행하고, 사족처럼(그러나 의미의 영역에서는 앞의 내용을 뒤엎는 의미심장한 반전) 짧게 ‘그리고 다시 Q’를 마지막에 얹고 있다. 독자는 첫 번째 Q&A만 읽어도 기계처럼 이후 진행 형식을 간파하게 마련이어서 이때에는 반전의 장치가 필요하다. 이 작품에서는 최소연과 김 박사가 다섯 번 오고간 Q·A의 순조로운 관계를 한순간에 파괴하는 ‘그리고 다시 Q’가 그것이다.
그리고 다시 Q
Q 김 박사님 김 박사님…김 박사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잘 들었어요. 하지만 김 박사님…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를,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을 네 이야기 말이야!
-‘김 박사는 누구인가?’ 중에서
풍부해진 ‘예언과 암시’
소설은 이야기에 그치지 않은 고유한 미학이 창출될 때 작품으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기호는 누구나 겪는 일상의 파편(이야기)들을 취사선택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배치(디자인)함으로써 이야기마다 고유성을 부여하는 데 탁월한 감각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수록된 8편의 이야기는 재미(감각)에만 그치지 않는 작가의 성정(性情 또는 인간관, 세계관)이 배어 있는 진실한 작품들이다.
이번 소설집의 특징은 이기호 소설의 특장인 ‘이야기하기’에서 나아가 ‘예언과 암시’가 풍부해졌다고 할 수 있다. 독자가 일방적으로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작가가 곳곳에 배치한 틈(공간)으로 들어가 공명하는 묵시록이 그것이다. 1980년대 구로동 노동자로 살았던, 20년의 삶을 프라이드 자동차 한 대에 바친 삼촌의 순정을, 이 소설집의 표제작으로 삼아도 좋았을 ‘밀수록 가까워지는’의 드라마가 특히 그러하다.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의 도구가 아닌, 인간의 미적인 영역(예술)을 창조하고 체험하는 세계임을 이 작품은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허리를 더 아래로 깊숙이 숙인 채, 프라이드를 밀었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삼촌은 이렇게 집적 민 것 또한 노트에 적어놓은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그 거리는 어떻게 잴 수 있는 것일까.
-‘밀수록 가까워지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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