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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한 형식, 암시의 묵시록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이야기의 한 형식, 암시의 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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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한 형식, 암시의 묵시록

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문학과지성사, 404쪽, 1만3000원

세상에 소설가는 많으나 이야기에 능한 소설가는 많지 않다. 이야기꾼에게는 대개 ‘천부적’이라는 수사가 부여되는데, 국내 작가로는 황석영 박완서 김소진 성석제, 국외 작가로는 영국의 로알드 달과 아프가니스탄계 미국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 그리고 중국 작가 위화 등이 그들이다.

소설의 근간이 이야기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작가마다 태생과 기질이 다르듯 이야기를 구사하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세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소설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 어떤 작품도 (기계로 만들어낸 스마트폰이나 이어폰처럼) 똑같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가의 능력은 세상에 널린 수많은 이야기에서 작품이 될 만한 소재를 선택하는 안목과 이것을 전달하는 방법에서 가늠된다. ‘최순덕성령충만기’(2004),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2006), ‘사과는 잘해요’(2009)에 이어 최근 ‘김 박사는 누구인가?’(2013)를 출간한 이기호는 바로 ‘소재 선택’과 ‘다채로운 화법 창출’ 면에서 2000년대 한국 작가군(群) 중 유력한 존재다.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나를 찾아왔어. 사무실로 왔어. 우릴 보러 사무실로 왔어. 그녀의 매니저도 왔어. 좆나리 멋진. 크라이슬러 밴을 타고 왔어. 매니저의 양아치들도 함께 왔어.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그녀가 우리. 보도방에 왔어. 육개월 만에 왔어. 자신을 지우러. 지우러 왔어. 신참 계집애들은 신났지. 가수가 왔다고. 신이 나서 환장해. 신이 나서 소리쳐. 하지만 그녀는 차에서 안 내려.

-‘버니’ 중에서

천부적 이야기꾼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에 관계된다. 누구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또 하고 싶어 한다. 이기호는 인간의 이러한 호모 내런스적인 기질을 다양한 서사체를 통해 실험한다. 앞에 인용한 데뷔작 ‘버니’부터 첫 소설집 ‘최순덕성령충만기’에 수록된 단편들에서 이야기하기의 기술을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랩의 형식을 빈 ‘버니’의 랩체를 비롯해 성서의 이단 편집과 번역된 의고(擬古)투를 차용한 ‘최순덕성령충만기’의 성서체가 대표적이다.



1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노니

2 이는 대저 믿는 자에게 내린 성령충만의 산 역사요 증거더라

3 서울 땅 아현동에 스물두 살 된 처녀가 한 명 살았으니 그 이름이 최순덕이더라

4 순덕은 이미 그 어미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규례대로 흠 없이 산 자이니 성경으로 글자를 배우고 회당을 놀이터 삼아 자란 자이더라

-‘최순덕성령충만기’ 중에서

이처럼 이기호는 데뷔작 ‘버니’와 표제작 ‘최순덕성령충만기’를 통해 신인 작가에게 통과의례처럼 주어지는 새로움의 존재 증명을 충만한 이야기성(性)을 바탕으로 한 다채로운 문체 실험으로 치렀고, 이후 두 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와 장편 ‘사과는 잘해요’를 통해 21세기 한국 소설계에서 하이브리드 문체를 구사하는 이야기꾼으로까지 명명되며 입지를 다지고 있다. 그 결과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이야기꾼의 재능에 그치지 않는 문체 실험자의 역할을 계속해왔는데, 최근에 낸 신작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지난 7년간 그가 궁구한 문체 고안자로서의 면모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첫 번째 Q&A

Q: 김 박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막 사범대학교를 졸업한, 올해 스물네 살이 된, 임용고시 재수생입니다. 이름은 그냥 최소연이라고 해둘게요. 꽤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끙끙거리고 있다가 이렇게 김 박사님께 펜을 들게 되었어요. (…) 김 박사님이라면 저와 똑같은 증상을 지닌 사람들을 여럿 만나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용기를 낸 거죠. (…) 김 박사님, 제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약 4개월 전이었어요. (…) 어떤 목소리가, 남들에겐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계속 제 귓전에만 들려오기 시작한 거죠. 높낮이도 없고, 감정도 없고, 성별도 모르겠고, 나이도 모르겠고, 가끔 노래방 에코처럼 울리면서 들리는 (…) 차마 다시 적기도 민망한, 난생처음 듣는 욕설들이었다는 것만 밝혀둘게요.

-‘김 박사는 누구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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