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불공정 하도급 근절책은 분리발주 법제화”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3-10-21 16: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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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공정 하도급 근절책은 분리발주 법제화”

    2월 21일 대통령직인수위에서 각 분과 간사들이 국정 비전-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지난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건설업계에 만연한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공공공사 분리발주 법제화 추진’을 주요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5월 28일 정부가 발표한 ‘박근혜 정부 140개 국정과제’에도 대규모 계약의 분할 분리발주 법제화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6월 14일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건설산업 불공정 거래관행 개선방안’에서는 분리발주 법제화 내용이 제외됐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때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국정과제로 채택한 내용이 정작 주무부처 발표에서는 빠진 것이다.

    전문건설업계는 건설업계에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 관행이 만연한 주된 이유로 통합발주에 따른 수직계열화 생산방식을 꼽는다. 분리발주 법제화 등을 통해 수평적 생산체계로 바꿔야만 고질적인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업계의 줄기찬 요구를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가 외면한 이유는 뭘까.

    제동 걸린 분리발주



    건설공사를 수행하는 방식은 크게 통합발주와 분리발주로 구분할 수 있다. 통합발주는 발주자가 사업내용이 확정된 전체 공사를 하나의 원도급 업체에 일괄 발주하는 방식이다. 통합발주를 하면 전체 공사를 종합적으로 계획하고 관리하며 조정할 원도급사를 예외없이 종합건설사가 맡는다. 공종별 시공을 담당하는 전문건설사들은 하도급사로 공사에 참여하게 된다. 발주자는 원도급사와 계약을 맺고, 원도급사는 시공을 담당할 하도급사와 공종별로 각각 계약을 맺어 공사를 진행한다.

    공사 계약 단계에서부터 발주처-원도급사-하도급사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통합발주를 수직적, 계층적 생산체계라고 한다. 전문건설업계가 ‘통합발주’를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이 생기는 근본 원인으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주처와 원도급사는 1대 1로 동등한 계약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원도급사와 하도급사는 1대 다수의 계약관계로 변모해 원도급사가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반면 분리발주를 하면 발주자는 토공사와 철근 콘크리트, 마감, 설비공사 등 건설공사를 구성하는 개별 공종을 각각의 시공 능력을 보유한 전문업체에 나누어 계약하게 된다. 분리발주를 하면 통합발주 때 하도급사 지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전문건설사들도 발주자와 1대 1 계약을 맺는 원도급사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지난 대선 때부터 분리발주 법제화를 학수고대한 전문건설업계는 분리발주 법제화 움직임에 제동이 걸리자 크게 반발했다. 지난 9월에는 대한전문건설협회 주도로 ‘전국 5만 건설하도급업체 및 150만 건설하도급 가족 일동’ 명의로 분리발주 법제화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등 각계에 냈다. 탄원서에서 전문건설인들은 “(건설업계에 만연한) 불법행위를 근절하자는 것인데도, 종합건설 측은 자신들의 이윤침해 방지를 위해 엉뚱한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정부는 그것이 설득력이 없음에도 법률 개정을 주저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강조했다.

    하도급사에 불이익 전가

    정부와 새누리당이 분리발주 법제화에 제동을 건 이유는 ‘분리발주를 할 경우 건설공사가 잘못됐을 때 책임이 불분명해진다’거나 ‘분리발주로 발주기관의 업무량이 증가한다’는 등의 부작용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건설업계는 “분리발주를 하면 오히려 책임시공이 이뤄져 품질 확보는 물론 예산 절감도 가능하다”고 반박한다. 분리발주가 고질적인 불공정 하도급 행위를 근절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한 전문건설 관계자는 “분리발주를 법제화하면 중소·지방건설업을 육성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해서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리발주 법제화에 대한 전문건설업계 요구가 거세지자 새누리당 정책위원회는 ‘발주제도 선진화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 7월 9일 국회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는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 등 유관 부처 관계자와 대한건설협회, 대한전문건설협회, 건설산업연구원, 대한건설정책연구원, 건설기술연구원, 조달연구원, LH공사 등 건설산업 주요 기관 관계자들이 참여해 의견을 개진했다. 하지만 분리발주 시행에 대한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각계 의견을 청취하는 수준에 그쳤다.

    “불공정 하도급 근절책은 분리발주 법제화”
    9월 11일에는 국회에서 민주당 이미경, 김현미 의원 주최로 ‘공공건설공사 분할, 분리발주 제도화를 위한 국가계약법 개정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학계와 전문건설업계 관계자들은 ‘분리발주의 즉각 시행’을 주장했다. 다만 민주노총 등에서는 분리발주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건설노동자 보호 대책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 전문건설 관계자는 “노동단체들은 분리발주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 취약계층인 건설노동자를 위한 대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이었다”며 “토론회 참석자 대부분은 수평적 생산방식인 분리발주가 미래 세대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임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국내 공공공사는 국가계약법 시행령 제68조에 따라 전기공사와 정보통신공사 등 일부 공사만 예외로 하고 원칙적으로 분리발주를 금지하고 있어 통합발주 방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통합발주는 중소 건설업체를 대부분 하도급사로 전락시켜 저가 하도급은 물론 불법, 불공정 하도급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폐해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통계청이 2011년 실시한 건설업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건설업체 수는 총 4만9494개로 이 가운데 중소기업에 해당하는 상시 근로자 300인 미만의 전문건설업체가 3만9012개사로 집계됐다. 전체 건설업체의 78.8%를 차지하는 전문건설사들이 통합발주에 따라 대부분 하도급사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통합발주에 따른 불이익이 ‘을’의 처지에 놓인 하도급사에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점은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민주당 이미경 의원이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4대강 공사에 참여한 한 종합건설사는 원도급 공사를 2890억 원에 수주한 뒤 17개 하도급업체에 원도급 공사비의 43.6%에 불과한 1260억 원에 하도급 공사를 실시하게 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공구에 원도급사로 참여한 또 다른 종합건설사도 32개 전문건설업체에 원도급 공사비의 45.4% 수준에서 하도급 공사를 하도록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 “업계 합의 필요”

    하도급사에 공사비를 현금으로 지급할 경우 6%를 감액하는 등 원도급사가 ‘갑’의 횡포를 부리는 것이 건설업계에 관행처럼 굳어져 있는 점을 감안하면 통합발주에 따른 불이익을 대부분 하도급사인 전문건설사들이 떠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불법, 불공정 하도급 행위를 근절하겠다면서 하도급법과 각종 하도급 보호제도를 만들어 시행해왔다. 그럼에도 일선 건설 현장에서 불공정 하도급 관행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전문건설업계는 “수직적이고 계층적인 통합발주 방식을 개선하지 않고는 불공정 하도급 관행을 근절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9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분리발주 법제화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은 불공정 하도급 관행을 끊기 위해서는 분리발주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권오인 경실련 국책사업팀장은 “분리발주는 건설산업의 다단계 하도급 생산구조의 고리를 끊어 발주 방식을 다양화한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분리발주 필요성을 강조했다. 유호선 숭실대 교수도 “통합발주 자체가 불공정의 시작”이라며 “분리발주 법제화는 한국 건설산업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의 현실적 대안이자 시대적 요청”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최소한 공공공사만이라도 분리발주 의무화를 도입하도록 관련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원준 대한전문건설협회 경기도회장은 “통합발주제에서는 원도급사가 공사비의 30~40% 이상, 어떤 경우는 50~60 % 이상을 일반관리비와 이윤 명목으로 공제하고 하도급을 주는게 현실”이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건설 근로자의 임금이나 자재, 장비 대금도 제때 주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학계와 시민단체, 전문건설업계가 한목소리로 분리발주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주무 부처에서는 업계의 이해관계가 엇갈린다는 이유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토론회에 참석한 윤석호 기획재정부 계약제도과장은 “분할, 분리발주를 하는 경우 발주처의 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대책도 함께 마련돼야 하므로 최저가 낙찰제 개선대책에 분리발주 방안도 반영할 계획”이라면서 “업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만큼 업계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처럼 정부는 종합건설업계와 전문건설업계 간 이해가 상충된다는 이유로 분리발주 법제화를 머뭇거리고 있지만, 분리발주를 연구한 각종 보고서에 따르면 분리발주를 시행할 경우 불공정 하도급 관행 개선은 물론 예산까지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 홍성호 연구원이 작성한 ‘공공공사 분리발주 법제화의 효과 및 도입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통합발주 방식에 비해 분리발주를 했을 때 공사비의 약 5% 절감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사관리비 부담 크지 않다”

    보금자리주택특별법은 공사비 절감을 통한 분양가 인하를 위해 분리발주 방식 중 하나인 발주자와 공종별 시공자로 구성된 직할시공제를 도입하고, 보금자리주택 물량의 5% 범위 내에서 시행토록 규정하고 있다. 직할시공제를 도입하면 종래의 생산구조를 3단계에서 2단계로 축소해 시공업무는 공종별 시공자가 담당하고, 공사관리 업무는 보금자리주택 시행자인 LH공사가 맡게 된다. 안양, 관양 지구가 이같은 직할시공제 시범사업에 해당한다. 이곳의 공사비는 통합발주 방식에 비해 약 5.0% 절감됐다.

    대형 종합건설사들은 분리발주를 하면 종합적인 공사관리 업무를 발주자가 떠안게 돼 비용과 관리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문건설업계의 설명은 다르다. 공사에 들어가는 모든 공종을 분리발주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나 토목 공사 등 일부 공종만 분리 발주하면 발주자 관리업무 부담이 크지 않다는 것.

    일례로 안양, 관양 직할시공제 시범지구의 경우 37개 계약 패키지로 나눠 공사를 완료했는데, 이때 공사관리비는 전체 공사비의 4.4%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부 공종만 분리발주하면 공사관리비 부담이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전문건설업계가 전면적인 분리발주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며 “공사 추정가격 100억 원 이상의 대형공사에 대해 전체 금액의 40%, 3개 이상 업종에 대해서 분리발주를 요구하고 있다”며 “이 정도 분리발주라면 관리비 부담이 그리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분리발주 법제화는 건설업계에서 하도급사 지위에 놓인 전문건설사들의 숙원사업이다. 한 전문건설사 관계자는 “입찰 부조리가 만연하고 불공정 하도급 관행이 보편화한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모순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는 제도가 분리발주”라며 “대등한 지위에서 공사에 참여하고, 그 대가를 발주자로부터 직접 받게 되는 것만으로도 불공정 하도급 관행은 많이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발주자의 선택권과 자유계약의 원칙을 중요시하는 선진국들도 공공공사에서 분리발주를 법제화하고 있다고 한다. 홍성호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미국와 일본, 독일에서는 분리발주를 통해 공공예산을 절감하고 부가가치 및 고용창출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이들 선진국은 수직적 생산체계가 갖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공공공사 분리발주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선진국이 공공공사 분리발주를 법제화한 것은 건설생산체계에서 하부구조를 담당하는 전문건설업체의 경쟁력을 향상시켜 얻을 수 있는 공공의 이익이 발주자 선택권과 자유계약의 원칙을 준수해 얻을 수 있는 가치보다 크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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