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화 닭실마을.
찻길이 홀연 강줄기와 나란히 하는 데서부터 눈에 잡히는 산봉들의 모습이 범상치 아니하다. 높고 기이한 산을 더욱 훤칠하게 하는 이 강줄기가 바로 청량산 기슭을 돌아 이현보 종택 앞으로 흘러가는 낙동강 최상류 물길이다. 강줄기는 이어 이육사 시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른 뒤 퇴계 선생의 묘소 뒷산을 휘감아 돌고 도산서원을 거쳐 안동호로 든다. 빼어난 산수가 인걸을 낳고 키운다는 말은 이 산과 이 물길에서 실감하게 된다.
화려한 산의 자태는 강을 건너 산의 품 속에 든 뒤에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산길이 제법 길고 경사가 있지만 청량사까지는 누구든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데, 이곳 절 마당에서 마주하는 산 풍경이 실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반공(半空)에 솟은 산봉우리들은 마치 푸른 바다에 뜬 돛배 같기도 하며, 햇빛을 반사하는 너럭바위와 무성한 숲은 출렁이는 수면 같다.
맑은 가을날의 청량산은 말 그대로 만산홍엽이다. 눈길 가는 데마다 선홍빛, 주황빛 단풍이 드리워져 산속에 든 이의 속살마저 붉게 물들일 듯싶다. 절 뒤편에 난 등산로는 단풍 터널과 다를 바 없다. 단풍에 취하며 걷다보면 더욱 놀랍고 황홀한 경치를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땀 흘린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분의 복이다. 이른바 6.6봉(12봉우리)의 빼어난 풍광이 차례로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청량산에 기대는 마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인봉은 청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870m)다. 가장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먼 데서도 위용이 선연한 그 봉우리다. 정상에 서면 발 아래로 병풍처럼 늘어선 기암절벽들이 내려다보이고, 먼 데의 크고 작은 산들은 물론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장인봉 동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선학봉이다. 청량산 열두 봉우리의 이름은 조선시대의 유학자 주세붕이 풍기군수를 지내던 때 직접 이곳을 유람하며 지었다고 전하는데, 이 봉우리가 마치 학이 날아오르는 듯한 형세를 하고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산은 그 자체로 위엄과 기품을 갖기도 하지만, 명류의 문필과 언사에 힘입어 이름값을 더하는 경우도 많은데 청량산도 예외는 아니다. 주세붕뿐만 아니라 신라의 명필 김생과 문장가 최치원이 이 산을 거들고 있는 데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학자 이퇴계가 화룡점정의 훈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何處無雲山
어딘들 구름 낀 산이 없으랴마는
淸凉更淸絶
청량산이 더욱 맑고 빼어나다네
亭中日延望
정자에서 매일 이 산을 바라보면
淸氣透人骨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네
-퇴계의 시 ‘망산(望山)’
청량산에 관한 퇴계의 여러 시문 가운데서도 그 애정이 가장 짙게 드러나는 시편이기에 이 시는 청량사 경내의 돌에도 새겨져 있다. 퇴계에게 산수는 자신의 학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라서 산수는 언제나 반성과 규범의 대상으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 지고한 가치는 맑음과 꼿꼿함(淸絶)인데 이는 곧 퇴계 자신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퇴계가 청량산을 주희(朱熹)가 머물던 중국 무이산(武夷山)으로 자주 상정하곤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평생 주자를 공부하면서 스스로 그 세계를 더 넓고 깊게 했던 퇴계는 실제로 무이산을 가보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여 자신의 이상향 무이산을 청량산으로 옮겨올 도리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