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이체크가 만든 단체가 그럼?”예림이 조심스레 물었다. 긴 얘기를 마친 회장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하이체크는 추격자의 숙주였습니다. 에바 브라운을 통해 그 두더지에게 접근하고 있었던 겁니다. 왜 그리 조심스레 접근했냐고요? 차원세계가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개입해야만 하니까! 임계점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우주엔 수많은 이동자가 있고 그에 맞먹을 숫자의 추격자도 있습니다. 세상이 달리 보이지 않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예림이 다시 물었다.
“독일의 그 조직은 아직 건재한가요?”
“물론입니다. 제가 어떻게 이런 은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유서 깊은 인류의 저항 조직이 포진해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를 혹시 아십니까?”
“네. 16세기 프랑스의 신비한 예언가 아닌가요? 흑사병을 치료한 의사이기도 했고. 그럼 그도?”
“맞습니다. 지구의 차원 균형을 유지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수없이 실패하기도 했죠. 두더지들은 집단 파동을 일으켜 소행성이나 거대 운석을 지구로 몰고 오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차원의 지구는 그로 인해 박살나기도 했을 겁니다. 이번 차원의 지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벌써 일어났지만 추격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는지도 모르죠. 헬리혜성의 경우처럼.”
회장의 목소리가 마치 묵시록을 낭독하는 수도사의 그것처럼 전시실 안을 메아리쳤다.
2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예림은 여러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수석의 민서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당황스러우시죠?”
고개를 갸웃한 예림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얼떨떨해요. 칼손 교수, 아니 그 이동자를 만난 뒤부터 제 일상이 뭔가에 의해 크게 부서진 느낌이 드는군요.”
창문을 약간 열어 찬 공기를 유입시킨 민서가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근데…, 참 신기하죠? 그 수많은 추격자와 이동자 중에 교수님과 제가 같은 존재들과 접촉했다는 게.”
“그러게요. 우리 자주 만나도록 해요.”
차가 민서의 충정로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잠시 망설이던 민서가 문을 열고 내리려 할 때 예림이 말했다.
“실은 저 숨긴 게 하나 있어요.”
예림을 가만히 쳐다보던 민서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 남편으로 화했던 그 추격자 말인데. 제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했어요.”
“어떤?”
“그 추격자는 두더지 조직의 정체에 대해 분명히 깨닫고 있진 못했어요.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존재는 그였으니까…, 아무튼 꼭 물어봐야만 했거든요. 인류의 정체에 대해서.”
“인류의 정체? 무슨 뜻이죠?”
“인류 탄생의 비밀 말이에요. 혹시 인류가 두더지들이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창조한 종이 아닌지…, 그걸 물었거든요.”
민서가 숨을 멈추고 상대를 똑바로 응시했다. 예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럴 거라고. 지구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낸 최고의 무기가 바로 우리 인류일 거라고.”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