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자는 홀로 죽는가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그는 특유의 처진 눈꼬리로 사람 좋게 웃는 분이었다. 내 작은 손에 5000원짜리 지폐 한 장이라도 꼭 쥐여주시던 따뜻한 분이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 넷을 데리고 외할머니 댁을 자주 찾았다. 그의 마지막이 이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여자보다 외롭게 죽는 남자
팀원 한 명이 술자리에서 우연히 이 얘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모두 “왜?”라고 물었다. 단란했던 여섯 식구는 가장의 장례식에 오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사업을 하며 쌓아왔을 인맥도 한낱 모래알 같았다.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왜 죽기 직전까지 누나에게조차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을까. “대체 그 남자는 왜 혼자 남겨졌지?” 이 작은 의문이 우리를 무연고(無緣故) 사망자에 관한 취재로 이끌었다.
무연고 사망자 공고. 신원미상이거나 아무도 시신을 찾아가지 않은 사망자들은 이 공고에 포함돼 각 구청 홈페이지에 올라간다. 서울에서만 한 해에 280여 명의 무연사가 발생한다. 2010년 273명, 2011년 301명, 2012년 282명이었다. 공고문은 한 달 동안만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종종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기도 한다. 우리는 2012년 3월부터 2013년 5월까지의 무연고 사망자들을 추렸다. 총 83명이었다.
무연고 사망자 목록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숫자. 83명 중 남자는 77명, 여자는 6명이었다. 77 대 6. 너무도 확연한 차이. 우리의 의문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왜 남자가 더 많지?
무연고 사망자 대부분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가 취재한 83명 중에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나 무직인 사람이 많았다. 일자리가 있는 경우에도 공공근로거나 일용직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서울의 가장 가난한 공간에 살았다. 취재를 하려고 우리가 자주 찾아간 곳은 쪽방이나 고시원이었다. 평범한 동네인가 싶다가도 갑자기 허름한 곳이 나타났다. 강남 주소지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3층 주택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쪽방이 나왔다.
하지만 경제적 형편만이 ‘왜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무연사하는지’에 대한 답이 되지는 않는다. 무연사할 확률이 비교적 높은 독거노인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2011년 서울시 독거노인 중 71%가 여성이었다. 저소득 독거노인 비율도 여성이 남성보다 3배가량 높다. 이 수치대로라면 무연사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그러나 77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라는 뚜렷한 차이. 현실은 달랐다.
왜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무연사할까. 똑같이 가난한데도 왜 여성과 달리 남성은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외롭게 죽는 걸까. 2013년 봄,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갔다.
아주 사소한 실마리
무연고 사망자 83명 중 쪽방촌에 머문 이는 16명, 고시원에서 살던 사람은 8명, 여관에서 장기 투숙한 사람은 3명, 주택 단칸방이나 쪽방에서 살던 이는 22명, 아파트에서 죽은 이는 5명 등이었다. 그곳은 그들이 마지막 생을 보낸 장소고, 꽤 오랜 거주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옆방 사람도, 집주인도 그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가끔 동네 오다가다 마주친 게 다예요. 교회 다니시고, 약주 하시고.” 김권호 씨의 옆집 사람이 그에 대해 기억하는 전부다. “사촌 여동생한테 얹혀살면서 같이 옷가게를 했어요.” 마지막 거주지에서 이진수 씨에 대해 얻을 수 있는 단서도 딱 여기까지였다. “딸이 있다고 했나?” 강영호 씨의 옆방 남자가 말하자,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아니지, 아들!”이라며 정정했다. 기억은 엇갈리기도 했다.
작은 실마리로 취재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교회를 다녔다는 언급 하나로 시작된 취재도 많았다. 이금순 씨의 경우에는 성당에서 온 우편물만 보고 무작정 성당을 찾아갔고, 오민규 씨에 대해서는 “폐지 줍는 일을 했지”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온 동네 폐지 수집상을 찾아 헤맸다. “택시 회사에서 일했어요.” 최명식 씨처럼, 직장을 알게 된 건 꽤 고급 정보에 속했다. 마지막 주소지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하면 공고문에 적힌 등록기준지에 가보기도 했다. 취재는 한 번에 끝나는 법이 없었다.
한 곳을 여러 번 찾기도 했다. 이순모 씨에 대해서는 첫 취재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두 번째 찾아갔을 때 “아, 맞다. 경로당에서 일했던 거 같던데”라는 말을 들었다. 조승만 씨의 경우 네 번째 찾아갔을 때 비로소 봉제공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김민숙 씨의 행적을 찾아 세 번이나 요양원을 방문했지만 원장으로부터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마지막 시도로 원장에게 손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이렇게 확보한 작은 단서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강남구부터 은평구까지, 김포공항에서 올림픽공원까지 서울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늘어나는 교통비에 비례해 무연고 사망자의 모습이 하나하나 완성돼 갔다. 그들의 삶은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했다. 그들은 가족이 없어서, 가족과 연락하지 못해 혼자였다. 다른 관계를 찾지 못하며 더욱 외로워졌다.
77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똑같이 무연사했더라도 여자는 좀 덜 외롭게 죽었다. 김민숙 씨는 요양원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교회에서는 그녀의 장례를 치러주려고 했다. 이금순 씨도 생전에 가족처럼 지내던 간병인이 그녀의 유품을 정리해줬다. 가족이 없어서 결국 무연고 사망자 명단에 올랐지만 적어도 그녀들의 마지막은 외롭진 않았다.
그리고 7명의 남자
무연고 사망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자. 그들이 외롭게 죽어간 이유는 분명 있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대표할 7명의 사례를 글로 풀기로 했다.
우리가 취재한 무연고 사망자 83명 중 나이를 알 수 없었던 1명을 제외하면 30대가 2명, 40대가 14명, 50대가 20명, 60대가 23명, 70대가 14명, 80대가 7명, 90대가 2명이다. 사망자는 50~70대에 몰려 있었다. 이들을 위주로 사례를 추리고, 다시 과거 직업과 결혼 여부가 겹치지 않도록 7명을 골랐다.
이들의 삶은 남자가 무연사하는 과정을 그대로 압축해 보여준다. 왜 이 남자들은 홀로 죽어야 했을까. 이 글은 이런 의문에 대한 우리 나름의 답이다. 무연고 사망자와 무연생자(가족 등과 연락을 끊고 혼자 사는 사람)의 이름, 무연고 사망자의 가족이나 이웃의 이름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내가 20, 30대일 때만 해도 (스웨터 제조) 일이 굉장히 많았어. 섬유 산업에 종사하던 사람 월급이 공무원 월급보다 많았지. 그땐 새벽에 나와 10시까지 일해도 일을 다 못할 정도였어. 근데 지금은 이것만 해선 돈을 못 벌어. 공장이 겨울에만 돌아가니까.”
양 사장은 1990년대부터 중국으로 섬유공장이 이전하기 시작하면서 일감의 단가가 떨어졌다고 했다. 섬유산업은 점점 사양화했다. 당시 조승만 씨는 30대였다. 줄어드는 일감에 직장을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변변찮은 수입 탓에 고시원, 여인숙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양 사장은 조승만 씨가 결혼하지 못한 데는 불안정한 수입이 한몫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의지가 있었으면 결혼했을지도 모르지. 사실 우리도 일이 불안한 건 매한가지지만 다 결혼은 했거든. 아무래도 (가족에게) 버림받은 게 크지 않았나 싶어.”
양 사장은 조승만 씨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어려서 친부모에게 버림 받았다. 친누나가 있지만 외국으로 입양되면서 연락이 끊겼다. 다행히 조 씨도 입양되어 새 가족이 생겼다.
“강원도 인제인가 원통인가 아들 없는 집에 양자로 들어갔대…. 근데 그 집이 사업에 실패해서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결국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에서 나왔대.”
홀로 마시던 술
조승만 씨는 2, 3년 전부터 “나는 오래 안 산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그가 술을 갑자기 많이 마시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젊을 때도 술을 마셨지만, 일 나가기 전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던 그였다.
술을 마시면서 그의 삶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밥 대신 술을 마시기 일쑤였고, 일이 있어도 공장에 나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동료들과 어울렸지만, 모두 가정으로 돌아가고 나면 혼자 또 술을 마셨다.
“죽기 전날 절 찾아왔거든요. 겨울이었는데. 저희 집 방이 두 개인데 방 하나가 비어 있었어요. 들어와 살라고 할 걸. 그 말을 못한 게 가장 후회가 돼요.”
십년지기 동료인 아저씨는 조승만 씨 앞으로 우편물이 날아올 때마다 후회된다며 눈물을 훔쳤다. 주위에선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 사장은 일을 안 나와도 월급을 챙겨줬고, 식당 주인은 ‘술은 못 줘도 밥은 언제든 공짜로 주겠다’며 밥을 차려줬다. 많은 배려에도 그는 끝내 자살을 택했다. 십년지기 동료 아저씨는 말했다.
“돈 모을 생각을 안 했어요. 삶에 의지가 없었죠. 가족이 없으니까 그랬겠죠.”
7장
버려진 남자, 최명식
도봉역을 나와 한참을 걸었다. 길목은 좁아졌고, 건물은 늘어났다. 굽이굽이 골목을 지나 어렵사리 그가 살았던 고시원 간판을 발견했다. 건물 입구, 유리문에는 군데군데 청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곳곳에는 쓰레기가 나뒹굴었고 본디 흰색이었을 벽은 갖가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배다른 누나가 있을 거예요, 아마. 부모하고는 일찍 헤어진 것 같던데.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고시원 주인은 최명식 씨가 아내와 이혼했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고시원에 들어와 4년 동안 머물렀다. 주인은 그가 직장 동료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혼자 지냈다고 기억했다. 그 외 더 알고 있는 건 없었다.
최명식 씨의 마지막 일터인 ㅅ택시 회사에 찾아갔다. 고시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사무실 안. 직원들은 맹목적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고, 곳곳에는 사훈을 비롯해 기운을 돋우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주차장 한 켠에는 같은 복장을 한 한 무리의 운전수들이 보였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최명식 씨와 가장 가깝게 지냈다는 지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혼, 그리고 아들의 외면
그는 최명식 씨의 초등학교 6년 후배로 둘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둘은 한동안 연락이 뜸했다가 ㅅ택시에서 재회했다. 최명식 씨는 이곳에 오기 전에 사업을 했고, 어느 기업 회장의 운전수로도 일했다.
“그 형이 원래는 참 성실했다고. 그런데 이혼하더니 갑자기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하더라고.”
후배는 최명식 씨가 사업 실패로 이혼했을 거라 짐작했다. 최 씨는 아내와 헤어진 후 술을 마셨지만 그렇다고 일을 빠지진 않았다.
“아들놈이 하나 있었다고. 개망나니였지. 가정이 그러니 뭐가 제대로 됐겠어. 형이 이혼하고 좀 지나서 군대에 있는 아들한테 만나자고 했나봐. 그랬더니 그 개망나니 놈이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나봐. 으이구. 장례 때도 안 나타났으니 말 다한 거지 뭐.”
아들에게서 외면당한 뒤 최명식 씨는 술을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 없었고 일 나오는 횟수도 줄었다. 결국 그는 해고당했다. 후배의 도움으로 다른 택시 회사에 취직했지만, 거기서도 같은 이유로 그만두게 됐다. 그러고도 최명식 씨는 매일 술을 마셨다. 보다 못한 후배는 t택시에 재입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최 씨의 건강은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우리는 ㅅ택시를 나와 최명식 씨가 사망한 혜담요양원으로 향했다. 요양원은 도봉역에서 멀지 않았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휠체어에 의지한 노인들이 보였다. 어떤 사람은 멍하니 벽을 응시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눈길 한번 보낼 뿐, 그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했다.
원무과를 찾아 최명식 씨에 대해 물었다. 분주하게 서류를 정리하던 직원은 대답해주는 대신 우리를 사무실로 인도했다. 사무실 직원은 또다시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오렌지 주스를 대접했다.
최명식 씨가 처음 요양원에 왔을 때 그는 무일푼이었다.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 일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내보낼 수 없어 일단은 받아줬다고 한다. 그때부터 약 한 달간 최 씨는 이곳에서 생활했다.
“최명식 씨가 돌아가신 게 저희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려고 서류를 준비하던 중이었어요. 부모도 안 계셔서 전부인께 연락했지만 단칼에 거절하시더라고요. 아드님도요. 할 수 없이 우리가 대리신청을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더라고요.”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건 가족도 직장 동료도 아니었다. 요양병원 직원들이었다.
에필로그
남자를 무연고자로 만드는 사회
지난 4개월간 우리는 83명의 무연고 사망자를 취재했다. 그들 대부분은 연고자가 있는데도 거부당한 경우였다. 국립의료원의 무연고 사망자 담당자 주영로 씨는 “법률상 연고자의 범위는 넓다. 따라서 연고자가 없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법률상 연고자는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뿐 아니라 사촌에 팔촌까지 모든 가족과 친척을 포함한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사망자를 보호하거나 유골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시신을 거둬갈 수 있다. 2012년 국립의료원에서는 회사에서 시신을 인수한 경우가 1건, 사회복지단체가 인수한 사례도 1건 있었다. 사망자와의 관계만 증빙할 수 있다면 누구든 시신을 거둬갈 수 있다.
주 씨는 “최근 10여 년 사이에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하는 일이 급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남성의 경우 시신 인수 거부가 더 많다고 했다. 우리가 취재한 83명 중 93%에 해당하는 77명이 남성이었다. 왜 남성은 사회와의 관계를 잃고 무연사하는 걸까.
탑골공원에서 만난 김응수(67) 씨는 일주일에 사흘은 탑골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아들과 함께 살지만 일은 하지 않는다. 돈이 없다보니 눈치가 보여 매일 집 밖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가는 모임은 없다. 그는 “남자는 돈이 없으면 모임에 못 나간다. 다른 사람이 한 번 사면 나도 한 번은 사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 되다보니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연고 있는 무연고자
모임도 경제력에 따라 ‘파(派)’가 갈린다. 역시 탑골공원에서 만난 이근동(72) 씨는 “탑골공원 내에서도 일당 5만 원 버는 사람과 10만 원 버는 사람의 모임이 따로 있다. 벌이에 따라 점심 메뉴가 다르니 벌이가 다르면 같이 놀지 못한다”고 말했다. 경제력이 없으면 사회적 관계조차 맺지 못하는 게 남자의 현실이다.
우리가 만난 83명의 무연고 사망자는 대부분 가난했다. 무연사 전문 유품정리업체인 바이오해저드 김석훈 실장은 “내가 현장을 다니면서 본 사람들은 모두 돈이 없었다. 비빌 데가 그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는 “돈 있는 남자는 혼자 살지도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우리는 경제력이 가정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얼마나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했다. 2013년 6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소외계층이 많이 사는 서울 종로구 돈의동과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서 1인 가구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남자 41명, 여자 5명 등 총 46명에게서 답을 얻었다. 결혼 여부에 따라 구분하면 이혼 25명, 미혼 13명, 별거 6명, 무응답 2명이다.
미혼이라고 응답한 13명은 모두 남자였다. 그중 9명은 결혼하지 못한 이유로 ‘경제적 사정’을 꼽았다(가정환경 2명, 마땅한 배우자가 없어서 1명, 기타 1명, 무응답 1명). 조승만, 이근성 씨가 결혼하지 못한 것 역시 불안정한 수입 때문이었다.
가정을 꾸린 후에도 경제력은 여전히 중요했다. 이혼했다고 응답한 25명 중 남자가 21명, 여자가 4명이었는데, 이혼한 남자 21명 중 15명은 이혼사유로 ‘경제적 사정’을 꼽았다. 구체적으로 ‘소득이 낮아서’ 8명, ‘사업 실패’ 5명, ‘실직’ 2명이었다(성격차이 2명, 가정폭력 1명, 술 1명, 기타 2명). 반면 이혼한 여자 4명은 ‘남편의 질병’이 2명, ‘남편의 폭력’이 1명이었다(응답 거부 1명).
우리는 83명의 무연고 사망자를 취재하면서 경제적 이유로 이혼한 경우를 숱하게 봤다. 최명식 씨도 사업 실패로 이혼했다. 국립의료원의 사회복지사 이승민 씨는 남성 행려환자를 상담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워드로 1997년 이후 외환위기를 꼽았다. 그는 “많은 환자가 외환위기 때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해 이혼한 후 생활이 망가져 노숙자가 됐다”고 전했다.
무연사한 임승규 씨를 취재하다가 경기 고양시 무허가촌에서 만난 장동화(60) 씨는 아들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후에는 아들과 연락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아들과 만나면 짐만 될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서 만난 이인택(55) 씨도 아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연락하면 서로 마음만 아프다. 나도 내 죄를 알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내세우기 쑥스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쪽방촌에서 설문지를 돌리면서 ‘짐이 되기 싫어서’ 가족과 연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많은 남자가 자신이 무능력해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가족과 인연을 끊고 있었다.
쪽방촌에 과거는 없다
심리 치유를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 힐링카페를 운영하는 김지중(30) 씨는 “남자는 나이 들면서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커지는 반면 사회에서는 고립돼간다”고 말했다. 가정에 대한 책임은 가장(家長)의 유일한 역할이고, 이 책임을 위해 일에 몰두하다보니 다른 사회적 관계를 맺을 여력이 없다. 친구와의 만남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점점 줄어든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력을 잃고 가정이 해체되면 고립은 심각해진다.
동자동 쪽방촌의 이인택(55) 씨는 이곳에 오기 전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는다. “내가 이러고 사니까. 그 사람들은 잘나가고 빵빵하잖아. 나처럼 이런 데 사는 사람과 같겠어?” 설문조사 결과도 이인택 씨와 마찬가지였다. 쪽방촌 남자 41명 중 27명이 이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 11명은 ‘금전적 이유’로 연락하지 않는다고 했고, 5명은 ‘체면 때문에’라고 했다. ‘생활환경이 달라져서’는 4명, ‘친한 사람이 없다’가 3명, ‘상대가 먼저 연락을 끊었다’가 2명이었다(기타 2명).
사회가 부여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남자는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어버린다. 남에게 의존하는 남자를 무능력하다고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남자는 도움을 청하는 일에도 익숙하지가 않다. 경제력을 잃은 남자는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위 사람들과 연락을 끊는다.
그리고 이들은 체면을 지키려고 가면을 쓴다. 고양시 무허가촌의 장동화(60) 씨는 “동네 사람들과 깊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대부분 왕년에 잘나갔다는 얘기만 한다”고 했다. 동자동 쪽방촌의 백창환 씨는 과거 휴대전화 관련 사업을 크게 했다고 한다. 그는 대학생인 우리에게 “원하면 취업시켜주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이웃 주민들은 “허풍이니 믿지 말라”고 귀띔했다. 우리는 백창환 씨에게서 서울대 출신 김근수 씨를 떠올렸다.
“술 마실 때만 친구”
술은 무연사 남자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근성 씨와 박성종 씨는 술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했다. 반면 우리가 취재한 무연사 여자 중에는 술에 의지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노숙인재활센터인 서울시립 비전트레이닝센터 사회복지사 김병기 씨는 “남녀 성향의 차이도 있는 거 같다”고 했다. 여자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친구를 만나 수다로 풀지만, 남자는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김 씨는 “사람을 만나지 않다보니 분을 삭이기 위해 혼자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무연사한 배형구 씨는 주로 방 안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배형구 씨와 같은 건물에 살았던 이웃은 “술을 사러 갈 때 빼고는 잘 안 나왔다. 그래서 이웃 주민과 친분이 없다. 정부에서 나오는 돈은 방세와 술값으로 다 지출했다”고 회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쪽방촌 쉼터 사회복지사는 “쪽방촌 주민들끼리 친해 보인다”는 우리의 말에 “대부분 술 마실 때만 친구가 되는 사이”라고 답했다. 이 쉼터의 또 다른 복지사도 “같이 술 먹는 사이지만, 상대가 죽어도 딱히 안타까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돈의동에서 설문지를 돌리다 만난 임순복(83) 할머니는 고아라서 가족은 없었지만, 동네 할머니들과 슈퍼마켓 앞에서 매일 모여 담소를 나눈다. 바이오해저드 김석훈 실장은 “사건 현장에 가면 남자 비율이 80%가 넘는다. 할머니들은 혼자 살아도 옆집 할머니랑 친하니까 고독사하지는 않는데, 남자는 동네에서 조용히 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국립의료원 사회복지사 이승민 씨는 “소외계층을 상담할 때 종교나 지역모임 등 사회 네트워크에 참여하느냐고 묻는데, 남성은 집에만 있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반면 여성은 지역민과 잘 지내는 편이라고 한다. 우리가 만난 83명의 무연고 사망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은 가족과 연락이 끊겨도 교회, 이웃 등과 관계를 맺었지만, 남성은 그러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남성과 달리 무연사한 여성은 힘든 처지를 숨기지 않았다. 무연사한 전금자 씨는 평소 힘들다는 얘기를 자주 했고, 주변 사람들은 전금자 씨가 수급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전금자 씨를 취재하러 갔다가 만난 최명순(84) 할머니도 독거노인이었다. 할머니는 인터뷰 도중 “내일 새벽 5시에 병원에 가야 한다”며 약을 먹었다. 차도 없이 이른 새벽에 혼자 갈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니 “아들이 와서 데려간다”고 했다. 할머니는 자식들이 모두 지방에 살아서 혼자 살지만 자주 통화하고 만나며 지낸다. 복지단체인 효도본부에서 봉사도 하고, 교회를 다니며 주변 사람들과 교류한다.
서울대 출신 김근수 씨와 20여 년간 함께 산 이문자 할머니도 경제적 형편이 김근수 씨와 마찬가지로 어렵지만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고 있었다.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복지관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자주 집을 비웠다. 김근수 씨와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고, 친동생과 자주 연락하며 지냈다.
여성도 가난했지만, 무연(無緣)이나 고독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여성은 보호의 대상이지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경제력을 잃었다고 해서 가족이 떠나거나, 거짓으로 관계를 만들거나, 술에 의존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무연고자로 만드는 남자
우리가 무연고 사망자를 취재하면서 마주했던 현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가 그리 각박하지도 않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하지도 않았다. 무연사한 남자에게도 ‘관계’는 분명 존재했다. 가족도 있었고, 손 내밀면 그들을 도와줄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 모든 관계를 끊게 했다.
무연사는 사회가 남성에게 부여한 경제적 짐 때문에 발생했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다. 우리 사회는 고도성장을 거치면서 가장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가장이라면 당연히 가족 구성원을 지켜야 하고, 그렇지 못한 가장은 무능력하다며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사회의 도움 없이 남성이 모든 가족의 안녕을 책임지기란 버거운 일이다.
오늘날 남성은 관계가 짐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사회가 남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관계는 어땠을까. 결국 이 거대한 짐은 남성을 무연의 생(生)을 거쳐 무연고 사망자로 만들고 있다.
취재후기
전하지 못한 꽃송이
서울시립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 우리가 취재한 무연고 사망자들의 시신이 화장 후 안치돼 있는 곳이다. 2013년 6월 20일 이른 아침, 우리는 703번 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달려 이곳으로 향했다. 다들 취재할 때와는 달리 말쑥한 차림이었다.
‘이번 정류장은 용미리 제1묘지입니다.’
안내방송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한적한 시골길,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입구에는 창고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덩그러니 동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잎사귀가 시든 황량한 나무들…. 우리가 무연고 사망자들을 의식하고 있어선지,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스며 있는 듯했다.
산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추모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안내원이 말했다. “거기 바로 보이지 않아요? 컨테이너박스 같은.” 길의 초입에 있던 작은 창고가 떠올랐다. 설마 그곳일까 싶어 다시 물었다. “네. 맞아요. 그 건물이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컨테이너박스’ 앞에는 마땅한 안내판조차 없었다.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잔뜩 녹슬어 누런빛으로 변한 자물쇠에서는 사람의 손때를 찾을 수 없었다. 창문에는 철창살이 둘러져 있어 마치 감옥을 연상케 했다. 창문 표면에 붙은 뿌연 필름지로 인해 안을 들여다보기가 불가능했다.
자물쇠와 철창살, 그리고 뿌연 창문.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은 그렇게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한 분 한 분에게 헌화하기 위해 하나씩 포장했던 꽃송이들은 소용이 없어졌다. 결국 낡은 자물통에 꽃송이들을 놓아두고 돌아서야 했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취재하면서 든 죄책감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에 대해 캐서 뭐해. 지금 말한다고 무슨 도움이 돼?” 취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사실 이 말이 맞다. 이미 과거로 묻힌 누군가의 죽음을 현재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말하는 이들의 처지에선 참으로 괴로운 일 아니었을까. 그 괴로움을 직접 맞닥뜨린 순간마다 우리는 망설이고 고민했다.
경기도 고양시 철거민 송민철 씨의 딸을 찾았을 때다.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스피커폰을 통해 흘러나온 한이 서린 목소리. 그것은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영역임을 알리는 경고이자 간절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취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무연고 사망자들의 현실 때문이었다. 사는 곳은 다 달랐지만 무연이 된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비슷했다. 일용직조차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거나 고령의 무연자들은 기초생활수급비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한 평 남짓한 쪽방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이마저 구하지 못하면 거리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눈에 노숙자들은 우리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길거리의 가로수나 휴지통과 같은 ‘정물’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이고 뭐고 나랑 상관없지 않으냐.” 취재 중 노숙인 쉼터에서 만난 한 노숙자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그들에게 사치였다.
사람들은 무연사가 성격적 결함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취재하며 깨달은 바는 달랐다. 이들을 소외시킨 것은 바로 우리 사회였다. 돈이 있어야만 가족을 가질 수 있게 만든 사회. 짐이 되느니 가족과 연락 끊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회.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 이것이 우리가 목도한 현실이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 무연사의 현실이 더 많이 알려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4개월에 걸친 우리의 취재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한 시간이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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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울대 나온 남자, 김근수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오후, 김근수 씨의 등록기준지인 서울 중구의 한 쪽방촌에서 취재가 시작됐다. 좁은 골목길을 수놓은 무채색의 쓰레기 봉지더미를 지나며 찾아간 곳은 한 여인숙. 입구에 설치된 발을 열어젖히며 주인 아주머니에게 김근수 씨를 아느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그를 기억했다.
김근수 씨는 동대문 아파트에 살다가 5년 전 이 동네로 이사 왔다고 한다. 쪽방 생활의 시작은 이 여인숙이었다. 그는 부인 이문자 씨와 20년 넘게 결혼생활을 하다 사망 1년 전에 이혼했다. 사망 몇 개월 전까지 병에 걸린 그를 돌봐주던 여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엔 혼자였다. 공고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었다.
‘교회 쉼터 내에서 변사자에게 밥을 주기 위해 변사자를 깨웠으나 숨을 쉬고 있지 않는 등 사망한 것을 같은 교회 후배가 발견하고 119 및 112에 신고한 것임.’
우리는 그가 죽은 교회로 향했다.
교회는 쪽방촌 입구 건물 2층에, 구멍가게처럼 허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냥 넓은 방 하나가 교회의 전부였다. 거기서 쉬고 있는 노숙자들 사이에 조규철 목사가 있었다. 목사에게 김근수 씨에 대해 물어보니 다행히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서울대 53학번’
“그 사람, 서울대 출신이에요. 우리가 확인해보니까 맞긴 맞아. 서기관 공무원으로 한 4급까지 했고요.”
서울대 동문회 기록을 보니 그는 상경대 53학번이었다. 2006년 2월 서울대 동문회에 평생회비 20만 원을 납부한 자료가 남아 있었다. 그는 공무원 생활을 접고 건축 사업을 몇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보니 점점 가세가 기울었고, 서민 아파트에 살다가 결국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쪽방으로 오게 됐다.
한번은 김근수 씨와 대학 동기였던 사람이 교회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조 목사에게 서울대 관련 기사를 보여주었다. ‘김근수’란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대학 동기는 조 목사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
“저 사람 조심하세요. 예전에도 뻥 많이 치던 사람이에요.”
김근수 씨는 조 목사에게 ‘내가 어디에 120억 원 정도 있는데 나를 여기서 살게 해주면 교회를 위해서 십일조로 좋은 데 쓰겠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술 좋아하고 거짓말 잘하고. 그래서 주위 사람과 어울려지지가 않았죠. 자기는 수준이 있으니까. 자기 프라이드도 있고 하니까 사람들과 거리를 뒀어요.”
쪽방촌 이웃들 사이에서도 진실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주민 인터뷰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이름 정도를 알고 있던 사람들 역시 그를 허풍이 심하고 거짓말을 많이 하는 할아버지로만 기억했다.
“부인과 1년 전에 이혼했대요. 그전에도 두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몇 년 못 가서 이혼했다고 해요. 호적상에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친자식은 아니라나 뭐라나. 아, 양딸도 있다고 들었어요.”
양아들과 양딸. 둘 다 김근수 씨가 사업할 때 만난 사이다. 양아들은 김근수 씨가 쪽방 교회에 기거할 때 가끔 찾아와 돈을 요구했다. 양아버지의 안부를 살피러 찾아온 적은 없었다.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조 목사에게 전 부인 이문자 씨의 연락처를 물었다. 그는 망설이며 이문자 씨에게 직접 연락했다. “김근수 씨에 대해 살짝 언급해봤는데 반응이 좋지 않네요.” 조 목사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이문자 씨 역시 이 근처에 산다는 정보를 토대로 쪽방촌을 탐문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는 와중에 이문자 씨를 알고 있는 세탁소 주인을 만났다. 그는 우리의 취재 목적을 듣고 주저주저하더니 그녀가 사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짓 세월의 끝
우리는 문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김근수 씨는 부인에게도 그리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 목사를 비롯한 이웃들은 하나같이 그가 20년간 할머니에게 상처를 줬다고 했다. 전남편에 대해 물어보는 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일단 부딪쳐보고 그녀가 거절하면 그냥 나오기로 했다.
의외로 이문자 씨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김근수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는 양아들과 양딸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걔들은 만날 남편한테 사업자금 대달라, 얼마 빌려달라 그랬어. 말로는 ‘아빠, 아빠’ 하면서도 돈 달라고…. 근데 김근수가 돈 없다는 걸 알고는 언제부턴가 오지도 않더라고.”
20여 년 전, 이문자 씨는 전남편과 사별하고 김근수 씨와 재혼했다.
“서울대 나왔고, 집안이 부자였다고 소개 받았어.”
이문자 씨는 재혼 직후 이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디 땅을 사놨는데 그게 몇 백억짜리다, 근데 그린벨트에 묶여서 돈이 나중에 나온다…. 늘 그렇게 얘기했어. 23년 동안 그랬어.”
김근수 씨는 거물급 인사를 거론하며 ‘누구랑 친하고, 누가 나한테 돈 줄 게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아내에게 실제로 큰돈을 가져다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생활비조차 제대로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이문자 씨는 20년간 참고 또 참다가 남편 말의 사실 여부를 직접 알아보았다. 그가 항상 돈 받을 게 있다고 얘기한 동창 김모 씨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장관 출신에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김 씨는 남편과 동창인 것 외에는 남편 말이 사실인 게 없었다. 어디에 땅이 있고 받을 게 있다고 하는 것들, 그는 전부 모르고 있었다.
이문자 씨는 거짓말에 대해 남편을 추궁했다. 그러자 김근수 씨는 “그럼 같이 안 살면 되잖아!” 하며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런 싸움이 몇 번 반복됐다. 어느 날 그는 다른 여자의 차를 타고 와서는 이혼을 요구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몇 달 후 김근수 씨는 암으로 사망했다. 경찰서에서 이문자 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시신 인수 여부를 묻는 전화였다. 이문자 씨는 한참 망설이다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장례식을 치러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무연고로 처리될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시신 거둬줄 걸 그랬나봐.” 이문자 씨가 측은해하며 말했다.
“인간성은 나쁘지 않았어. 그냥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야.”
2장
연어를 닮은 남자, 김만호
한 중년 남성이 쓰러진 채 발견됐다. 거주지에서 꽤 떨어진 면목동의 한 놀이터였다. 공고에 쓰인 내용으로는 그가 왜 거기서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왜 자기가 살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어간 걸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처음 찾아간 곳은 시장 안 슈퍼마켓. 공고에 기재된 김만호 씨의 마지막 거주지였다. 시장에는 스물네댓 개의 상점이 죽 늘어서 있다. 상인들은 손님들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지 마냥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는 서울에서 흔치 않은 풍경이다.
“그 사람 여기 안 살았어요. 맞은편 주차장에서 노숙했지. 통장이 우편물이랑 이것저것 국가 혜택이라도 받게 할 요량으로 우리 가게로 주소를 해놨죠.”
슈퍼마켓 주인은 손님이 가져온 물건의 바코드를 찍으며 말했다. 김만호 씨가 이 동네에 온 것은 2년 전. 시장에서 오래 생활하진 않았지만, 상인 대부분은 그를 기억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 정도로 붙임성이 좋았다고 한다. 시장 사람들은 그를 ‘백대가리’라 불렀다. 머리카락이 희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주차장에 살던 ‘백대가리’
우리는 통장을 찾아갔다. 슈퍼마켓 옆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시장 상인이었다. 통장은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어투로 느긋하게 말했다. “영하인 날씨에도 시장 바닥에서 노숙하는 게 딱해 주소를 옮겨놓으면 동에서 뭐라도 받을까 해서 도와줬다”고 했다. 그런데 구청에 주소를 변경하러 가보니 김만호 씨의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돼 있었다.
“그 사람(김만호) 말이, 전북 고창에 형님이 한 분 계시는데, 형이 주민등록을 말소시켰다더라고요. 형제 사이가 안 좋았는지, 술만 먹으면 형님 욕을 그렇게 많이 했어요. (형님이) 시신 인수도 거부했다던데.”
김만호 씨가 이 동네에 처음 왔을 때 지낸 곳은 슈퍼마켓 앞 대중사우나였다. 매표소 여직원은 그가 목욕탕에서 6개월쯤 지냈다고 했다. 요금은 그가 폐지를 주워다 주던 고물상에서 내줬다. 목욕탕에서 생활할 때 김만호 씨는 깔끔해 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목욕탕에서 술을 예닐곱 병씩 마시기 시작했다. 결국 손님들의 항의로 목욕탕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는 목욕탕 옆 주차장에서 지냈다.
“한번은 노숙인 보호소에 들어갔어요. 시장에 우유 배달하는 분이 김 씨가 추운 겨울에 노숙하는 게 안타깝다고 쉼터에 보내줬죠. 근데 얼마 안 돼서 나오더라고요. 답답하다며. 얼어 죽어도 여기가 편하다며 다시 왔죠.”
김만호 씨는 노숙인 쉼터에서 석 달가량 생활했다. 통장은 그가 오랫동안 노숙한 터라 규칙적인 생활을 버티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는 김만호 씨에게 특히 금주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차장으로 돌아온 후부터 김만호 씨의 혈색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얼마 안 가 그는 시장을 떠났다.
김만호 씨와 가장 친했다던 우유가게 아저씨를 찾아갔다. 우유 팩을 정리하던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는 “뭐요?” 하며 찡그린 표정으로 우리를 경계했다. 김만호 씨에 대해서 물으러 왔다고 하자 금세 경계를 풀고 요구르트까지 쥐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부랑 면목동에서 살았어요. 과부한테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같이 살았죠. 면목동에서 목수일 할 때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뭐 돈도 잘 벌었으니까.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 그렇게 되고 나서 헤어졌대요. 술 먹고 일 잃자 쫓겨난 거죠 뭐.”
김만호 씨에게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서류상의 가족은 아니지만, 아들이라 부를 사내아이가 있었고, 아내라고 부를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었다. 다리를 다치면서 평생 해온 목공 일을 그만둬야 했다.
불편한 몸으로 중년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용직을 전전했고 생계는 어려워졌다. 결국 그는 불우한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던 아내와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일자리를 잃는 순간 가정도 잃었다.
죽기 전에 돌아온 고향
우리는 김만호 씨가 일했던 고물상 아저씨의 증언을 토대로 면목동에 있는 한 놀이터를 찾았다. 아저씨는 김만호 씨가 시장을 떠난 후 놀이터에서 생활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런데 놀이터에 있는 경로당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할아버지 몇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면목동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였다.
“1년 전쯤인가…. 영훈이(어린 시절 이름)가 갑자기 수십 년 만에 나타난 거야. 한참을 안 보이더니 여기서 노숙하더라고. 저기(뒷산을 가리키면서) 면목4동에 살았어. 판자촌이었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김만호 씨의 소꿉친구를 소개해줬다. 그는 김만호 씨의 어린 시절을 또렷이 기억했다. 어릴 적 김만호 씨는 내성적이라 자기 얘기를 안 하는 편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영향이 큰 것 같다고 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면목동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조적기술공으로 일하며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1년 전쯤 그는 모두가 놀랄 만큼 초췌한 몰골로 돌아왔다.
김만호 씨는 죽기 전 면목동을 찾았다. 이 동네는 김만호 씨가 유일하게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이다. 어린 시절 면목동에서 부모, 형제와 살았고 장년이 되어 새 가정을 꾸렸다. 김만호 씨가 살았다던 판자촌에는 고독해 보이는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죠. 동사무소에서 많이 도와줬거든요. 매달 월세 10만 원씩 나오지, 희망근로로 돈도 갚게 해줬지. 교회에서는 밑반찬 주지, 명절이면 선물 나오지. 그랬는데도 의지가 없었어요.”
우유가게 아저씨는 김만호 씨가 길에서 죽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통장 아저씨, 슈퍼 아저씨, 고철가게 아저씨, 생선가게 아주머니 등 많은 사람이 그를 도왔다. 누군가는 추울까봐 전기히터를 가져다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의 다친 다리를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병원을 알아봐줬다. 그럼에도 그는 삶을 개선하지 못하고 홀로 죽었다. “김만호 씨는 왜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우리의 질문에 우유가게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소망이 없었죠. 가정에 대한 소망…. 같이 살 사람이 없으니까 잘살 생각을 안 한 거죠, 뭐.”
3장
형제가 많은 남자, 이근성
고시텔 주인을 따라 긴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여기예요.” 주인은 우리를 오른쪽 방으로 안내했다. 세 명이 서기도 벅찬 다섯 평 남짓한 방.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먼지가 뒤섞인 공기가 코 안으로 들어왔다. 방 한쪽엔 상자가 쌓여 있고 바닥엔 비닐봉지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 물건들 틈에 이근성 씨의 유품이 있다. 라면상자 크기의 상자 하나와 봉지 두 개. 유품의 전부다.
상자를 열자 십자가와 종이묶음이 나왔다. 종이엔 일상을 기록한 글들이 적혀 있었다. ‘2012.12.10. 식료품 1만6000원 구입’, ‘2013.1.1. 새벽예배. 혈당 식전 82’…. 그는 매일 혈당을 체크했고, 지출 내역을 정리했다. 일기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한 20일 전쯤인가. 그날도 CCTV를 보고 있었어요. 아 근데 이근성 씨가 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복도를. 방에 가보니깐 온통 피가 있더라고요.”
고시원 주인은 응급차를 불렀고, 그는 병원에 실려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냄비에 고인 혈흔이 그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당시 정황을 한참 설명하던 주인이 “아!” 하며 말을 멈췄다.
“고아였어요. 저쪽으로 가면 (이근성 씨가 살던 보육원이) 있는데….”
우리는 은평천사원을 찾아갔다. 언덕을 오르자 족히 6층은 돼 보이는 큰 건물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한 아이의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아이는 쑥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초등학교 1, 2학년쯤 됐을까. 그 광경을 구경하던 친구들은 한참을 낄낄거렸다.
한 선생님이 우리를 빈 방으로 안내했다. 천사원에는 이근성 씨의 입소카드가 남아 있었다. 이근성 씨는 부모가 모두 사망하면서 천사원에 보내졌다. 입소카드에는 그의 학창시절 사진도 있었다. 또렷한 눈매에 통통한 얼굴. 운전면허증에서 봤던 핼쑥한 노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대화 말미에 선생님은 천사원 회장이 이근성 씨를 잘 알 거라고 귀띔해줬다. 우린 혹시나 회장에게 연락이 닿을까 해 연락처를 남겼다.
교통사고 후 일용직 전전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박동식 씨에게 연락했다. ‘박동식. 오전 11:03’. 그는 이근성 씨의 휴대전화에 번호가 저장된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시텔에서 막 나온 박동식 씨는 푸른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수염이 거뭇거뭇한 얼굴. “아무 때나 와.”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걸걸한 목소리가 그의 모습과 오버랩됐다.
그는 이근성 씨를 애주가로 기억했다. 이근성 씨는 여러 직장을 다녔다. 공고를 졸업하고 대한전선에 취직했다. 건설 붐이 일 땐 중동에 다녀왔고, 식당일도 했다.
한창 식당일로 바쁠 때 그는 버스에 부딪혀 머리를 다쳤다. 이후 일용직을 전전했고 서대문에서 폐지도 주웠다. 술을 마시다 결핵에 걸린 것이 이 무렵이었다. 박동식 씨와 헤어진 뒤 우리는 다시 천사원을 찾았다. 그날도 회장은 사무실에 없었다. 대신 직원은 총장을 소개해줬다. 총장은 더듬더듬 기억을 끄집어냈다.
“내가 알기론 40대 중반까지는 성실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40대 중반 이후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노숙으로 떨어졌죠.”
‘40대 중반 이후’는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일용직을 전전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 무렵 이근성 씨가 천사원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결핵을 앓던 그는 천사원에 도움을 청했고, 천사원은 병원비를 대줬다. 총장 옆에 있던 직원이 덧붙였다. “결핵약이 굉장히 먹기 힘든데, 그걸 다 드셨어요.”
보육원 출신들은 퇴소 후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인연을 이어왔다. 그중 하나가 전쟁고아들로 구성된 ‘민우회’다. 민우회 회장 김정훈 씨는 어릴 적부터 보육원 형제들끼리 우애가 깊었다고 했다.
“전쟁이 나거나 부모를 일찍 여의면 운명을 믿을 수밖에 없어요. (보육원에) 운명적으로 들어와 운명적으로 만난 사이지. 그러니 다 형제가 되는 거예요. 힘들어도 서로 챙겨주고, 미우나고우나 어쨌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그런 게 있다고요.”
하지만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았던 형제들도 이근성 씨의 부고를 알지 못했다. “진작 알았다면 민우회에서 (장례식을) 하든 그랬을 텐데” 하며 김정훈 씨는 혀를 끌끌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이근성 씨는 민우회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김정훈 씨는 대화 도중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근성 씨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답은 “없다”였다.
예배 스케줄 가득한 일기
김정훈 씨를 만난 뒤 우리는 그의 유품에서 발췌한 내용을 다시 확인해보았다. 일기에 적힌 그의 일과 대부분은 예배와 관련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일기를 토대로 베데스다교회를 찾았다. 교회는 그가 결핵으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근성 씨는) 오셔서 은혜를 받으셨죠. 주일날이며 새벽예배며 다 잘 나오셨어요.”
권사의 기억 속에 그는 신실한 성도였다. 이근성 씨는 1년 가까이 이 교회를 다녔다. 결핵이 거의 완치될 즈음이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출혈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예배 시간이 다 돼서요.”
권사가 대화를 끝내자고 했다. 예배당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십자가 앞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4장
기부하는 남자, 이명호
이명호 씨의 무연고 사망자 공고를 보고 찾아간 곳은 낡은 여관이었다. 빨간 벽돌을 쌓아 만든 주택들이 죽 이어지는 골목 어귀, 언뜻 보면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장소에 여관이 있었다.
“혹시 여기 계셨던 이명호 씨라고 아세요?”
주인 할머니는 대낮부터 여관 문을 밀고 들어온 우리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명호 씨의 마지막 주소지를 보고 찾아왔다고 하니 “그 양반? 벌써 한참 전에 죽었지. (여기엔) 한 3년 전쯤 들어왔나…” 할머니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양반이 무슨 미군 쪽에서 사업도 크게 하고, 중국에서도 사업하고….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어. 외국에 나가 있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혹시나 자식이 찾아올지 몰라 이명호 씨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유품을 볼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줘도 되나….”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이명호 씨가 썼던 두 개의 방 중 하나는 이미 깔끔하게 정리돼 손님을 받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 하나와 고동색 나무 창틀 앞에 나란히 놓인 서랍장과 옷장. 흔한 여관방이다. “이 방에서 잤고….” 할머니는 방문을 닫고 반대편 방문을 열며 말했다. “그리고 이 방에 짐 보관하고.”
불을 탁 켜는 순간, 조금 전 봤던 방과 달리 짐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창고 같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바퀴벌레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후다닥 사라졌다. 방에는 침대도 옷장도 없었다. 대신 서류뭉치가 방을 채우고 있었다. A4용지에 인쇄돼 묶인 각종 사업서류와 카드명세서 등이 뒤섞여 있었다. 상자에는 각종 약과 병원 기록, 앨범, 휴대전화 등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유품을 하나하나 꺼내 보았다. 파란 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패를 드립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손으로 털어내자 보인 문구. 한 대학에서 이명호 씨의 기부에 감사하며 보낸 감사패였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패를 드립니다’
취재를 마치고 여관을 나왔을 땐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주택가 밤거리를 걸으며 감사패를 준 대학과 이명호 씨의 이름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대학에 1억 원 기부, 문중 공사에 9000만 원 기부, 북한 어린이 돕기 사업에 기부, 교회에 기부…. 이명호 씨의 기부를 전하는 글들이 끝없이 이어져 나왔다. 모두 합쳐 어림잡아 4억 원은 될 법했다.
이명호 씨가 운영했던 사업체 이름과 주소도 알 수 있었다. 건축 관련 회사였고, 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이 있었다.
다음 날 그의 회사 주소지로 찾아갔지만 회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몇 년 전에 리모델링됐다는 건물 안에서 그를 아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더는 이명호 씨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 밖으로 나왔을 때다. 건물 옆 주차장에서 근무하던 경비원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그에 대해 물어보자 경비원은 반가워했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근무했다는 그는 이명호 씨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진짜 너무 보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 양반이…. 우리한테 잘해줘서 자주 생각나죠. 인정 많고, 남 잘 도와주고. 나이 많은 사람이 경비 노릇하고 있으니까 야식 사다주고, (전기난로를 가리키며) 이런 거도 사다주고, 돈도 많이 주고. 없는 사람들 많이 도와줬죠.”
경비원은 인터뷰 내내 좋은 사람이 무연고로 사망한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허참….” 그는 몇 번이나 한숨을 쉬며 “정말 홀로 돌아가셨느냐”고 재차 확인했다. “한 2년 전쯤 지하철역에서 만났어요. 퇴근하다가. 요 근방 어디로 (사무실을) 옮기신 거 같더라고요. 가끔 찾아가게 회사 옮긴 곳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그냥 저쪽이라고만 하시더라고요.”
경비원은 이명호 씨가 2009년 무렵 건물 임대차 계약이 만료되면서 회사를 옮겼다고 기억했다. 근처 어디로 회사를 옮긴다는 소식도 들었다. 하지만 경비원이 이명호 씨를 지하철역에서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집을 잃고 여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이명호 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그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여관이었다.
이명호 씨가 다니던 교회를 찾아갔다. 자리를 비운 목사의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목사는 처음엔 이미 사망한 분의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없다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 같은데 그렇게 돌아가신 게 안타까워서 그래요.” 목사는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노인들 위로잔치를 전국적으로 한 열댓 번, 부산 대전 서울 뭐 이런 식으로 해줬다고 알고 있어요. 한 번 모일 때 한 20명에서 50명이 오셨고. 자기가 가족 없이 혼자니까 돈 벌어 봉사하는 생활을 한 거죠. 어머니 생각나면 노인잔치 하고, 자식 생각나면 학생들 도와주고. 그렇게.”
이명호 씨가 왜 혼자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에겐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들이 있는데, 외국에서 교수를 한다’는 말을 종종 했다. 하지만 목사 말에 따르면 그는 1984년 이전부터 이미 가족과 따로 떨어져 혼자 살고 있었다.
이명호 씨가 1998년 무렵 큰돈을 기부했던 종친회에 연락했다. 이 정도 액수를 기부한 사람이면 종친회에서도 기억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알긴 아는데, 이미 10년 전에 연락이 끊겼어요.” 수화기 너머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품에서 발견한 번호로도 전화했다. 이름과 번호만 적혀 있던 한 줄의 메모. 성(姓)이 같았기 때문에 친척이 아닐까 싶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이명호 씨의 먼 친척이라고 했지만, 그의 사망 소식조차 알지 못했다. 가족에 대해 묻자 아내와 아들이 외국으로 훌쩍 떠났다는 얘기만 언뜻 들었다고 했다. 통화는 그게 끝이었다.
회사와 교회를 대상으로 계속 취재했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우리는 다시 여관을 방문해 유품을 살펴봤다. 지난번에는 유심히 보지 않았던 A4용지도 한 장 한 장 들춰보았다. 그리고 이명호 씨가 교회 목사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냈다. 정갈하게 타이핑한 편지는 교회 목사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몇 십만 원을 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그가 여관에 들어온 지 3년 만에, 파산 신청을 하고도 9개월이 지난 무렵에야 쓴 것이었다. ‘조만간 여유가 생길 테니 돈을 꼭 갚겠다’는 말도 여러 번 반복했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본인이 짐 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성격이.”
“남한테 피해주기 싫어서요?”
“그래요, 성격이.”
남자는 손 내밀지 않는다
교회 목사가 들려준 얘기가 떠올랐다. ‘타인에게 짐이 되기 싫다.’ 이명호 씨는 평소 남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부담이 되리라 여긴 듯했다. 사정을 대충이나마 알게 된 교인들이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마저 대부분 거절했다고 한다. 몇 달치 여관비가 이명호 씨가 받은 도움의 전부였다.
“여기 한 달 여관비가 얼마예요?”
여관을 나서며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 사람? 하루에 8000원씩 내고 지냈어.”
한 달에 24만 원가량인 여관방. 이명호 씨는 이곳에서 3년 가까이 지내다가 지난해 가을 병원에 입원했다.
2012년 9월은 이명호 씨가 죽기 두 달 전이다. 당시 그는 암에 걸려 몸이 매우 안 좋았다. 그가 걱정돼 119를 불러준 건 여관 주인 할머니였다. “꼼짝도 안 하는 거야. 내가 겁이 나서 밥을 줬어. 밥 먹고 왔다갔다 하더니 또 꿈쩍도 안 해. 그래서 119를 불렀어.” 할머니는 안타까워하며 당시 상황을 말했다. 그날은 추석이었다.
5장
술 마시는 남자, 박성종
나이, 성별, 구체적인 사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나와 있지 않은 무연고 사망자 공고문. 이름을 봐서 남자일 거라 짐작될 뿐, 특별히 그를 나타내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썰렁한 공고문을 훑어보다가 여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족 시신 거부.’ 그의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그의 가족이 있다.
역전이라 많은 인파가 오고가는 영등포역 삼거리. 거대한 빌딩과 화려한 쇼핑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불과 몇 십 m 떨어진 곳에 박성종 씨의 생전 거주지가 있다.
‘토마스의 집’. 무너질 듯한 2층 건물 간판에는 ‘도와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역전에서 느껴지던 활기는 없다. 회색 건물들, 퀴퀴한 냄새, 눅눅한 공기. 여기는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다. 간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은 이는 여기는 그저 급식을 나눠주는 곳일 뿐, 거주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 급식소를 이용했던 쪽방 주민이었나봐요. 거기 주민들한테 물어보세요.”
전화를 끊고 오른편 골목으로 눈길을 돌렸다. 길목에는 낮부터 술에 취한 사람 몇몇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이 미상, 성별 미상, 사인 미상
‘토마스의 집’ 뒤편으로 자리한 영등포 쪽방촌. 거리에 나와 있는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만취 상태라 대화가 불가능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소주병을 들고 우리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친구? 여기엔 그런 거 없어. 자고 일어나면 몽땅 훔쳐가는 게 영등포 바닥이라고. 다 거지야, 거지.”
골목 옆 구멍가게에서는 할머니들이 모여 TV를 보고 있었다. 박성종 씨에 대해 묻자 할머니들은 어렵지 않게 그를 떠올렸다.
“그 얼마 전에 죽은 사람? 술꾼, 술꾼 있잖아 왜.”
“아, 배 나온 아저씨? 맞네, 성종이.”
할머니들은 그를 ‘술 마시는 배 나온 아저씨’로 기억했다. 그게 전부였다. 얼굴만 몇 번 마주친 정도였고,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본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날씨가 어떻다는 식의 가벼운 대화가 전부였다고 했다.
구멍가게를 나와 골목 오른편에 위치한 요양병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병원 직원은 박성종이라는 이름을 듣고 단번에 누군지 기억해냈다. 그 역시 배가 잔뜩 부푼 채로 술을 마시다가 돌아가신 분이라고 했다. 역시 그게 끝이었다.
요양병원의 소개로 병원 맞은편에 있는 복지센터를 찾았다. 그곳에서 이 쪽방촌을 관리하는 복지사를 만날 수 있었다. 박성종 씨에 대해 묻자 제일 먼저 해준 말 역시 ‘술’이었다.
“술을 정말 좋아하셨어요. 아마 돌아가신 것도 술 때문일 거예요. 여기 계신 분들이 대부분 알코올중독이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술을 좋아했죠. 배가 이렇게 나와 가지고서도 계속 술을….”
박성종 씨는 복수가 가득 찬 배를 품고도 술병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밥 때에 맞춰 ‘토마스의 집’으로 가 무료 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하지만 센터조차 그에 대해 아는 사실이 더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센터는 복지사가 턱없이 부족해 쪽방촌 관리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사가 특정 주민의 개인사를 안다는 것은 무리다. 그때 복지사가 말했다. 그의 보호자를 자청하며 마지막을 함께한 누군가가 있다고 했다. 그의 이웃 이두석 씨다.
“바로 옆방 사시는 분이에요. 그분도 술을 많이 드시는 분이지만…. 나머지는 그분하고 얘기해보세요.”
이웃, 사람
‘토마스의 집’ 바로 옆 건물에는 무심결에 지나칠 법한 작은 철문이 있다. 그 문을 밀고 들어서서 좁은 계단을 오르니 복도를 따라 쪽방이 늘어서 있다. 그 복도 끝에 이두석 씨의 방이 있다.
빛이 들지 않는 복도는 어두침침했고, 창문이 한두 개 뿐이라 통풍이 되지 않았다. 막힌 공간에 축적된 술 냄새가 코를 찔렀고, 눅눅한 기운이 피부에 와 닿았다. 이두석 씨 옆 방문에는 ‘6호 박성종’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두석 씨는 술에 잔뜩 취한 채 방에 누워 있었다. 박성종 씨의 이름을 듣자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박성종 씨의 보호자라고 소개하며 장례를 치러줬다고 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술에 많이 취해 있어 더는 대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내일 다시 오라고, 내일은 꼭 술을 마시지 않고 있겠다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다음 날 우리는 점심거리를 챙겨 이두석 씨를 찾아갔다. 그는 철문 앞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새끼가 부산에서 뭔 일을 좀 했다고 하더라고. 자세한 얘긴 못 들었고. 무슨 일용직을 해 돈 벌어서 영등포에 십 몇 년 전에 떴어. 돈이 그때는 있었는데, 돈을 다 빼앗긴 거야. 그러고 밖에서 자는 걸 내가 여기로 데려왔어.”
이두석 씨는 박성종 씨의 첫인상을 허우대 멀쩡하고 훤칠한 40대 남자로 기억했다. 박성종 씨와 술 한잔한 것을 계기로 형님, 동생 하며 지내게 됐다. 이두석 씨는 서글서글한 성격의 박성종 씨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 주인 아주머니에게 박성종 씨를 소개해 방을 구해주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다른 이유가 있나, 뭐.”
‘새 가족 되기 프로그램’
젊었을 때 박성종 씨는 아마추어 권투대회에서 4강에 오르며 프로선수 데뷔를 꿈꿨다. 하지만 데뷔에 실패한 뒤 좌절감을 술로 해결했다. 그 안에 잠재된 폭력성은 술이 들어가면서 범죄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못 견딘 아내는 자살했고, 그 충격은 또 술로 이어졌다. 폭력은 함께 살던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그 새끼가 어머니를 팼어. 그러니까 딸이 (아버지로) 인정을 안 해주는 거야. 할머니를 패는 걸 보면서 ‘저건 아빠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겠지.”
가족도 돈도 모두 잃은 상실감을 박성종 씨는 쪽방에서 술로 달랬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아 절반은 방값으로 내고 나머지는 술값으로 썼다. 방에서 홀로 TV를 볼 때만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했다. 술에 취하면 밖으로 나와 주민들에게 온갖 시비와 폭언을 퍼부었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싸움에서 주인공은 늘 ‘술 취한 성종 씨’였다. 이두석 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박성종 씨를 찾지 않았다.
과음으로 5년 전부터 간경화가 악화되면서 온갖 합병증과 함께 배에 복수가 차올랐다. 그런 박성종 씨를 데리고 이두석 씨는 가리봉동의 효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병원비가 삼백, 사백 이렇게 나오는데…. 그놈이 잘했으면 주변에서 도와줬을지도 모르는데,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안 나타났지.”
박성종 씨는 복수를 서른 번 넘게 빼는 힘든 치료 과정을 모두 견뎌낼 정도로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이후 건강 상태가 호전되자 이두석 씨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도 했다. 오류동 연세중앙교회에서 ‘새 가족 되기 프로그램’을 둘은 함께 이수했다. 이두석 씨는 벽에 붙은 수료증을 한참 바라보더니 결국 참았던 눈물을 비쳤다.
“내가 이놈이 12월 27일에 죽을 때까지 돌봐줬어. 국민장례식장에서 수의하고, 염하고, 뭐하고. 그랬더니 150만 원을 달래. 해주고 싶어도 내가 돈이 어디 있어. 그래서 그랬지. ‘동사무소에서 가족한테 통보해놨으니 잠깐 기다려봅시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안 온 거야. 그게 가슴이 아프다 이 말이야, 나는. 눈물이 나, 눈물이.”
6장
스스로 목숨 끊은 남자, 조승만
‘발견 당시 노숙자풍으로 영축산에 쓰러져 있는 참나무 기둥에 박스 포장용 끈으로 목을 매고 사망해 있는 상태. 상위는 국방색 점퍼와 하위는 검정색 추리닝을 입고 갈색 안전화를 착용하고 있었음. 왼쪽 소지 아랫 부분이 목을 맨 끈에 베인 상처가 남아 있음. 이외의 다른 외상은 전혀 없음.’
자살. 조승만 씨의 무연고 사망자 공고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다. 공고에는 그가 어떤 상태로 죽었는지 자세히 기술돼 있었지만, 그가 목숨을 끊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조승만 씨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 이유를 알고자 우리는 그의 삶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집 없는 봉제공
4층 이하 단독주택들이 늘어선 오래된 주택가. 2000여 개의 봉제공장이 밀집된 성북구 장위동이다. 공고에 적힌 조승만 씨의 거주지는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낡은 주택이었다. 곧 떨어져나갈 듯한 철문을 두들기며 “조승만 씨를 아시느냐”고 물었다. 문 안에서 한 여자가 “그런 사람 없다”고 소리쳤다.
주소가 잘못된 건가? 우리는 습관처럼 우편함을 확인했다. 우편물에서 발견된 조승만 씨의 이름. 그가 살던 집이 확실하다. 그가 사망한 지 1년이 넘었기에, 현 거주자가 그를 모를 수도 있다. 혹시나 싶어 근처 이웃에게도 물었지만 대답은 역시나 “모른다”였다. 그만 포기하고 떠나려 할 때 아까부터 우리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조승만이는 왜 찾는 거요?”
아저씨는 조승만 씨와 봉제공장에서 10년 넘게 같이 일한 동료였다. 그의 아내가 조승만 씨에게 종종 반찬도 만들어줬고, 죽기 전날 조승만 씨가 그를 찾아왔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조승만 씨는 집 없이 여인숙과 고시원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저씨는 우편물이라도 받게 할 요량으로 조 씨의 거주지를 자기 집으로 옮겨놨다고 했다.
“장위동에서 옷 만드는 일을 거의 40년 정도 했지. 여기저기 공장을 옮겨 다니며 일했어. 여름에는 공장이 안 돌아서 건축일(일용직)을 했고.”
그는 조 씨와 같은 고시원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방세를 자주 밀렸던 조 씨를 대신해 돈을 내주기도 했다. 조 씨가 마지막으로 생활한 곳도 그 고시원이었다. 버스를 타고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고시원을 찾아갔다. 고시원 주인은 조승만 씨를 분명하게 기억했다. 밀린 방세를 내지 않고 몰래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고시원 사람들과는 교류하지도 않았다. 고시원 생활이라곤 밖에서 술 마시고 들어와 또 방 안에서 술 마시는 것뿐이었다.
돈 때문에 버림받은 아이
조승만 씨의 삶을 더 알기 위해 아저씨가 일러준 한 식당을 찾아갔다. 조승만 씨가 일이 끝난 뒤 동료들과 모여 매일같이 술을 마시던 아지트였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50년은 족히 돼 보이는 식당이 하나 보였다. 손으로 쓴 식당 간판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색이 바랬다. 술자리를 벌이기엔 조금 이른 오후 5시인데도 이미 만취한 남자들로 식당 안은 시끌벅적했다. 그곳에서 조승만 씨와 40년간 알고 지낸 양 사장을 만났다.
양 사장은 조승만 씨가 상계동에 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조승만 씨는 11세 때부터 장롱 만드는 일을 했다. 일하던 농방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상계동에 정착했다. 이후 스웨터 짜는 법을 배우면서 옷 짓는 일을 40년간 했다.